[소설] 두개의 세상 pt.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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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8. 27. 00:53

   숙희네의 여름은 아무데도 가지않고 집에서 보내졌다.
끽 해야 뒷뜰의 풀에서 물장구치면서 놀거나, 먹으러 나가기 싫으면 음식을 배달시켰다.
챌리와 킴벌리 자매는 만나기만 하면 늘 쑥덕거렸다. 그리고 둘이 나란히 집을 나서기도 했다.
운진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인데 숙희가 가만 있으라고 만류했다.
   "무슨 일이 있소? 함구령을 받더라도 알고나 지냅시다."
   "자긴 말해도 몰라. 그냥 가만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허 참, 자식들이 무슨 일일까..."
   "아빠한테 말 못할 딸들의 비밀?"
   "그 전에는 안 그랬는데."
   "그 때는 어려서들 그랬겠지. 인젠 아빠하고 말이 통하는 나이들이 아니지..."
가을 단풍 놀이도 그만 두었고, 크리스마스도 선물 교환으로 조용히 지냈고, 낼 모레면 밖은 망년회로 떠들썩할텐데 이 집은 큰 문제는 없지만 모두들 잠잠하다. 
심지어 예전에 계획해 놓았던 연말 크루스 여행도 취소했다. 
숙희가 돈을 무조건 아껴야 한다고 말해서 그렇게 되었다.
사실 숙희는 밖으로의 노출이 굉장히 두려웠다.
   연말 뉴스로 숙희가 20 여년간 몸 담았었던 은행이 오라이언 뱅크로의 합병으로 주주총회에서 인정되고 근 천명 가량이 감원된다고, 신문에서 대서특필 되었다.
TV 뉴스에서는 제프와 쑤의 사진이 잠깐 비쳤다.
   "오, 저기..." 
숙희는 말을 잊지 못했다. '제프도 결국... 잘렸구나...'
챌리와 킴벌리도 같이 TV 뉴스를 보다가 어-오! 했을 뿐이다.
이 연말에 천 명이라는 실직자가 어디로 가나...
곧 이어 그 두 은행의 합병이 과연 합법적인 절차를 밟고 시행했는지 그에 따른 피해가 어땠는지에 대해 연방 거래 위원회에서 조사에 착수했다는 뉴스도 나왔다.
숙희는 두 팔을 앞으로 해서 가슴을 끌어안은 자세를 취했다.
   '나야 자진 사퇴지만, 제프를 자른 것은 실수다. 제프 아니고는 지금 진행하는 사업을 이끌어 나가지 못하는데... 그리고 개리 주니어의 대디가 나서는구나.' 
그녀는 고개를 살살 저었다.
숙희는 어느 정치 정당에도 소속되어 있지않지만 근무하는 동안 많은 압력을 보아왔다.
보아하니 운진도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 눈치이다. 
그는 단지 주문 매상이 점점 줄어드는 것만 걱정할 뿐이다.

   정월 초이틀까지 사흘 연휴를 받았다고 운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디 가까운 데라도 여행을 갑시다." 
운진은 그 말을 했다가 숙희로부터 좋은 소리 못 들었다.
   "챌리 곧 결혼해. 돈이 만만치 않게 들텐데, 그럴 돈 있으면 내놓으시지?"
그래서 운진은 연말 특별 보너스 받은 것을 토해냈다.
그렇지만 운진은 마음이 즐겁다.
차라리 숙희 타입의 여성에게 아예 지고 들어가니 마음이 편하다.
젊었을 적부터 괄괄했던 여인이 오십을 채웠다고 수그러들까?
딸들도 새엄마가 지침을 딱 정해놓고 그것만 지키면 암말 안 하니 잘 한다.
   예를 들어 만일 귀가가 늦어지면 반드시 전화로 알릴 것이라든지 만일 술을 먹게 되면 될 수 있으면 그 집에서 자고 올 것이라든지. 그렇게 안 되면 엄마에게 전화해서 태우러 오라 할 것 등등 운진으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약속들이다.
딱 한번 숙희가 챌리를 태우러 간 적이 있었다.
친구 하나를 위로하다가 같이 마시게 되었는데 그 집에 믿지 못할 만한 브라더가 있어서 거기서 잠자기가 뭐 하다고 연락이 왔다고. 그것도 자정이 넘어서.
   그 때 운진은 화가 나서 막 뭐라 하려 했는데 숙희가 가로 막았다. 
   "나와 약속한 것을 지키려고 한 것이니까 자기는 빠져?"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딸을 보고 운진은 혈압이 머리 끝까지 치솟는데, 숙희가 부축해 주며까지 방에다 데려가 재웠었다.
숙희는 그런 짓이 낯설지 않았다. 마치 해 본 짓 같이 느껴졌다.
   의외로 폭력은 믿을 만한 곳에서 발생한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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