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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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8. 30. 00:37

   길거리는 밤새 약간 내린 눈으로 흰반점들 투성이었다. 아니. 
여기저기 눈이 녹아 흙반점 투성이 차 유리창에 흙물로 튀어 올랐다.
   '무슨 상관이야!' 운진은 자신에게 그렇게 외쳤다.
그 날 주문량은 아주 형편없었다. 소위 나인원원 테러 사태 이후 경제가 급속도로 나빠져가고, 사람들이 술을 덜 마시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군부대 전체가 파병 나간 북 캐롤라이나 주의 어떤 도시는 아예 폐장되었다고. 
아빠나 엄마 또는 집 식구들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데, 돈 쓰고 다닐 계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아내 숙희는 무슨 회사이길래 남들은 감원이네 축소네 하고 법석인데 윗돈을 얹어줘가며 고용하려 드는 것인지...
   여기에 운진의 눈 먼 사회 경험이 있다.
숙희는 재취업을 찾았지만, 솔직히 일정 기간만 필요로 하는 임시직이나 다름 없었다.
그녀의 특기가 감원과 예산 감축의 명수이다. 
그래서 어떤 기업체가 그녀를 윗돈을 주며까지 초청해서 구조 조정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회사 부사장이 숙희에게 노골적으로 구혼을 청한 것은 사실이고, 그 청혼은 숙희를 임시로 초빙하는 것과 별개였다. 
그녀는 사무실도 없이 아무 방이나 들어가서 걸어 잠그고 그 회사의 재정과 수지 타산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컴퓨터 한대만 지급받고 일한다.
숙희는 구태여 남편 운진에게 자세한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설명해봐야 이해도 못할 뿐더러 아마도 임시직은 이용만 당하는 거라고 펄쩍 뛰며 당장 그만두라고 성화를 부릴 것이다.
숙희가 일정기간 마치 청부 계약처럼 예산 절감과 감원 계획을 분석해 주면 수고비로 나올 보수가 연봉 삼십만 불짜리와 버금간다. 만일 남자였으면 오십만 불을 불러도 됐었을 텐데.
그녀는 먼젓 직장에서 배운 것처럼 얼마를 줄여야 적자를 면하나, 그 적정선을 13%로 잡고 일단 부사장을 면회했다.
   "Bad luck? (나쁜 운?)" 
잘 생긴 부사장 사내가 웃었다.
   미국에서 13은 금기된 숫자이며, 부사장이란 자가 그 13에다가 비교했다.

   그 날 쑤는 부사장의 저녁 초대를 정중히 거절했다. 
차라리 그녀는 남편이 늦는 것을 싫어한다고 그에게 대놓고 말했다. 
그랬더니 제레미의 얼굴이 머쓱해졌다. 
기혼녀인줄 알면서도 청혼을 해오는 무례함을 차마 거절 못 했던 쑤는 그럼으로써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을 씻으려 했다. 
그런데 그가 던진 다음의 안부 인사가 쑤의 뒷통수를 쳤다. 
   "How is he doing? (그는 어떻게 하고 있소?)"
똑같은 안부 인사인데, 유독 그 자의 어투에서 전류가 통했다.
   'How is he? (그는 어떤가?)' 하는 인사는 꼭 의미를 부여하지않고 누구나 주고 받는다.
그것은 '하우 아 유' 하는 인사와 같은 것이다. 
   '하우 이즈 히 두잉?' 
이런 인사는 어떻게 들으면 상태가 어떤가. 
다시 말하면 병세가 어떠냐고 물을 때 많이 쓰는 말이다. 
   "Lazy. (게을러.)" 
쑤는 다른 방향의 응수로 유도했다. 
제레미가 물은 것과 전혀 연관이 없는 대답이었다. 
   그는 어떻게 하고 있소? 즉 상태가 어떠하오? 
그런데 대답이 그는 게으르다 라고 나갔으니, 쑤는 그의 다음 반응을 기대했다.
   "레이지. 레이지. 흠..." 
그가 자꾸 되뇌이며 쑤를 흘끔흘끔 봤다.
쑤는 영어를 잘 못 알아듣는 수준이 아니다. 
완벽하게 구사하는 그녀의 영어 실력은 이미 다른 회사에서도 인정한 바였다.
이 회사 부사장 제레미도 쑤가 비록 동양 여인이지만 영어를 정작 미국인들 보다도 더 잘한다고 대학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칭찬한 바 있다.
그런 쑤에게서 전혀 엉뚱한 대답이 나왔다. 
그는 게으르다고...
남편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면, 게으르다는 말이 대답이 될 수도 있다.
남편은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물었는데, 게으르다고 대답한 것은 여러가지로 풀이된다.
어쩌면 그에게 발생한 일에 대해 마치 게으르듯 반응이 없다는 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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