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특히 아내들이 향수를 사려고 고르면 배우자가 동의하는 향을 선택하지않나?
전에 영란이 남편의 향수를 고르며 아마도 수십가지를 다 꺼내보라고 했던 것 같다.
하도 맡아서 코의 감각이 죽은 운진에게 이것저것 뿌려주며, '좋아? 맘에 들어?' 하고, 일일히 물었는데...
결국 영란이 좋은 것 같다 하고, 운진도 무난할 것 같은 폴로로 낙찰봤지만.
그런 다음 영란은 불란서제 향수 코너에 가서는 '나 이거 산다? 냄새 맡아 봐' 하고, 남편의 코에다 들이밀었다.
그래서 남편도 향내가 좋은 것 같다고 해야 사곤 했는데...
숙희가 늘 써오던 향수는 운진에게 두통을 유발하지만, 딸들의 말에 의하면 웬만한 사람은 만져보지도 못 하는 아주 비싼 종류라고 했다.
그래서 딸들이 간혹 훔쳐 뿌리곤 했는데.
그리고 그 향은 가끔 아주 고급스런 장소에 가면 아주 고급스럽게 보이는 백인 할머니들이 풍기는 향수와 같았다.
다시 말하면 숙희가 뿌리고 다니는 향수는 주로 백인들 취향?
그런데 이번에는 향이 부드러운 것으로 쓰기 시작하는데...
운진이 생각하기에는 암만해도 숙희가 그 향수를 남자한테서 선물 받았지 싶다. 카드와 함께.
아마도 선물처럼 싼 밬스를 뜯어서 향수병을 꺼내고는 따라온 카드를 읽어만 보고 내려 놓았다가 새삼스레 뒤늦게 치운...
숙희가 운진의 등을 툭 쳤다. "왜 기분 나쁘게 등을 돌리고 누웠어?"
운진은 눈이 떠졌다. "이게 편해서."
"그렇게만 해."
"..."
운진은 눈을 도로 감았다. '그렇게만 해? 뭘 그렇게만 해! 너나 그렇게만 해!'
이튿날 아침, 운진은 숙희가 출근한 뒤에 비겁한 짓을 한가지 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싸그리 뒤진 것이다.
그 접힌 카드가 나왔다. 욕실 벽에 붙은 조그마한 약장 안 깊숙한 곳에서.
숙희는 그 카드를 슬쩍 손에 쥐고는 화장실에다 숨긴 것이었다.
운진은 그 카드가 있던 위치와 각도를 잘 연구한 다음 꺼내서 펼쳤다.
'맨 앞자가 정말 제이였구만. 꿈도 신통하지... 제레미? 남자지, 역시...'
운진은 그 카드를 원래대로 잘 꼽았다. '잘 알았습니다, 한숙희씨. 그냥 이쯤에서 헤어집시다. 뭘 그리 숨기느라 애쓰시요.'
운진은 웬지 기분이 그리 씁쓸하지 않았다.
차라리 기대하던 일로 연결되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차라리 이쯤에서 깨끗하게 헤어지는 것이 피차에게 최상일 듯 싶다.
며칠 어디 좀 다녀온다는 쪽지만 남기고 일주일씩 증발했다가 돌아와서는 일언반구 설명도 없는 여인을 과연 아내라고...
참으며 살아갈 특별한 명목이 있을까?
어떤 남자가 남의 부인에게 향수를 선물하고.
아내란 이는 간단히 누구한테서 선물 받았다는 말만으로 일축하고.
그 향수를 저녁에도 아침에도 시도 때도 없이 뿌려댄다...
공짜로 생긴 향수라서 아깝지 않으니까 그런가?
오늘도 방 안 한가득 그 향수 내음이 지독하도록 가득하다.
그렇다면, 혹시 그 향수를 선물한 자의 코를 즐겁게 해주려고 온몸에다 뿌리고 갔을래나?
게다가 향수 내음을 맡는다고.
그리고 맡게 해준다고.
서로 몸을 부등켜 안고?
운진은 속으로 껄껄껄 웃었다. 희한한 여인이로군! 수준만 높은 척 한다 뿐이지 영란과 다를 바 없네.
에라이, 십할, 내 팔자도, 차암! 만나는 여자마다 맨...
어쨌거나 그는 그 날의 구역표를 챙겼다.
그 날은 좀 멀리 도는 코스이다.
핑게 김에 길에서 시간 좀 허비하고...
집에는 늦게 와야겠다.
그는 차가 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더니 영아네 가게로 향하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그가 그 가게에서 봉변을 당한 것이 못내 못마땅하다고?
하긴 그 여자는 정이 끌린다는 것을 모를 테니까.
그 나이 되도록 애를 안 낳아봤으니 그런 정을 알 리가 있나.
그 여자는 하다 못해 기른 정이 무엇인 지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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