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따라 운진이 서둘러서 돌아온 집은 늦게까지 텅 비어야 했다.
'쳇! 이럴 줄 알았으면...'
그랬다가 운진은 자신을 나무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뭐!"
설마 남편이 새벽까지 막탕으로 더듬고 갔을 남의 부인의 몸을 탐하고 싶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같이 있다가 오는 거라는 후회냐?
운진은 저녁으로는 라면을 삶아서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가 냄비를 싱크에 넣고 설겆이를 마악 시작하려는데 집 전화의 벨이 울렸다.
운진은 직감에 숙희다! 하고, 부엌 벽에 달라붙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헬로?"
"응, 자기 집에 있네?"
"응. 회사요?"
"아니. 나 지금 애들이랑 여기 있는 음식 코너에서 저녁 막 먹구 자기것 사 가려구 전화했지. 자기 뭐 시켜갈까 하고. 뭐 먹고 싶어?"
"어... 나 방금 라면 먹었는데."
"라면을 왜 먹어. 아이, 라면 버리던가 감추던가 해야지. 뭐 먹을 건데?"
"글쎄?"
"내가 알아서 시켜?"
"글쎄?"
"내가 알아서 시켜 갈께. 참! 애들은 따로 데이트 하고 늦을 거야."
"오..."
"씻은 거지?"
"응? 응... 씻어야겠지."
"얼른 씻어. 금방 갈께?"
"으..."
오늘 따라 아내 숙희의 음성이 들떠있다고 여기며, 운진은 수화기를 조심히 걸었다.
'참 내! 갑자기 정다운 척은! 비굴덩어리 같으니라구!'
금방 온다던 숙희는 통화를 끝낸 후로부터 두시간이나 더 지나서 왔다.
시켜 온다던 음식은 없었다.
연이어 딸 둘이 약속이나 한듯이 동시에 들이닥쳤다.
킴벌리가 하얀 비닐 백을 내밀었다. "대디. 푸드!"
"와우! 썩었겠다!"
챌리가 말하며 아빠와 엄마의 눈치를 봤다.
숙희가 암말않고 그 비닐 백을 통째로 부엌 쓰레기 통에 던져 넣었다. "아빠 라면 먹었대."
운진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뜻 모를 분노가 일었다.
남편 먹을 것을 알아서 시켜온다던 사람은 어떻게 된 거고.
딸이 다 식어빠진 음식을 불쑥 내밀다니.
이건 남편과 아빠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운진은 김 여인이 김칫종지를 가지런히 해주고 국그릇과 가까이 하도록 쟁반을 움직여준 장면이 눈 앞에 보였다.
'남도 그렇게 하는데!'
운진은 짐짓 못본 체 하며 지하실로 향했다. "먼저 자요. 나, 술이나 한잔 할테니."
"자기, 라면 먹은 속에 술을?"
숙희가 지하실로 따라 내려왔다. "자기 화났어?"
"왜 나는 맨날 화났느냐는 질문을 받고 사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
"맨날은... 오늘 킴벌리가 같이 나오다가 제이콥을 만났잖아. 그래서 도로 들어가서 얘기를 좀 하다가 깜빡 했지, 뭐야."
얘기가 달라진다?
운진은 미니 바 앞에서 아내를 마주 했다. "제이콥을?"
"그래애. 킴벌리하고 거기서 두어 차례 한국 음식을 먹어 봤는데, 뭐, 잡채가 맛있대나? 그래서 제이콥이 먹도록 기다렸지? 그리고 고 밑에 내려가서 프로즌 요구르트 나눠 먹구."
"..." 운진은 암말않고 술을 두 잔 만들었다.
숙희가 술잔을 받았다. "제이콥도 보채네? 빨리 결혼하자고..."
운진은 여전히 술만 기울였다.
이 여자가 애들 결혼을 왜 이리 보채지? 정작 서두려는 건 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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