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진은 혼자 앉아있다가 세 여자가 다가오니 풋 하고 싱겁게 웃었다.
"왜 웃어, 자기?"
숙희가 당연히 남편 옆자리에 앉았다. "내 마실 건?"
"그냥, 스프라잇 시켰소."
"잘 했어, 자기. 괜시리 캐페인 든 게 싫어지네?"
"왜?"
"몰라. 마치 누가 내 귀에다 그런 거 그만 마시라고 하는 것 같애."
운진이 숙희의 머리 언저리를 살펴보는 시늉을 했다. "아무도 없는데?"
"오오오!"
숙희가 건너편에 앉은 딸들을 보고 웃었다. "아빠가 조크를?"
"Is it? (그래?)"
"Is that a joke? (그게 농담이야?)"
딸 둘이 가볍게 응수했다.
숙희는 눈만 뜨면 진한 커피로 하루를 열고, 낮에도 조금 피곤하다 싶으면 역시 캐페인이 든 음료수를 찾곤 했는데, 이날 갑자기 그런 것들을 피하고 싶다. 왜.
이유는 그녀 자신도 모르는데, 아마도 본능적 같다.
게다가 그녀가 한술 더 떴다.
"이런 데서는 밀크 안 주지?"
"밀크?"
운진은 반사적으로 서브하는 여인들을 찾으려 했다. "당신이 밀크를 찾다니?"
"몰라, 나두. 갑자기 코에 밀크 냄새가 들어오네."
숙희가 그나마 소다 음료수 컵을 미는 시늉을 했다. "그럼, 난 그냥 맹물."
숙희는 지난 작업 동안 커피를 하도 마셔댄 바람에 카페인에 질린 몸이 이제 그만 들어오라고 반발하나 하고 혼자 속으로 웃었다. 그리고 부페에서 집는 음식도 늘 즐겨 먹던 튀김류나 해산물류를 피해서 야채와 과일들을 가득가득 담았다.
그녀는 남편이 껍질을 벗겨서 접시에 놓아주는 삶은 새우를 보기만 했다.
다른 때 같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소스에 찍어서 얼른얼른 먹곤 했는데.
마치 본능같고, 그리고 웬지 그러는 자신에게 무척 낯이 익다.
갑자기 식성이 변하나? 그렇다면, 이건 신경 써서 지켜봐야 할 징조인데?
그녀는 아주 오래 전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
랠프와 그의 사촌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난 후 자포자기했고, 맛을 못잊어 찾아오는 놈들에게 내주고 하던 시절.
임신이란 걸 했고 입맛이 달라진 걸 고모에게 들켰고...
겨울의 바닷가는 조용한 분위기를 즐기고 싶어서 찾아온 사람들로 아름답게 치장된다.
한 여름의 하루 종일 인파로 북적거리던 시가지는 차량도 드문드문 다니고, 어딜 가나 차 댈 데가 없어서 짜증나던 장소들도 소위 명당자리들이 널널하다.
운진가족이 바다를 찾은 이 날 따라 기온이 평년보다 조금 높다고 했다.
숙희가 유난히 남편의 팔에 매달려서 치대며 걷고.
딸 둘은 조금 뒤쳐져서 아주 정답게 얘기하며 간간히 아빠 엄마를 보기도 하며...
누가 보더라도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다.
남자라는 것들은 원래 생겨 먹은 것이 여자가 조금만 아는 척 해주기만 하면 폭 빠지는지.
운진은 숙희가 전혀 안 그러던 행동으로 착착 달라붙고 하니 그만 넋이 나간 것처럼, 그녀가 밀면 밀리고 그녀가 당기면 끌리면서, 걸었다.
여자는 원래 본능적으로 남자를 갖고 놀도록 그렇게 창조되었는지. 숙희는 머릿속으로는 수만 가지 장면과 생각이 오가면서도 일단은 곁에 있어주는 남편의 팔을 아예 매달리듯 잡고 걸었다.
이제는 그런 생활 청산하시요. 그리고, 그런 과거에서 빠져 나오고 싶은데 방해꾼이 많으면, 오형한테 모두 맡기고 매달리시요. 미쓰 한이 깜짝 놀라도록, 우리가 모르는 저력이 오형에게 있지라...
김 선생의 말이 그녀의 귀에 아직도 쟁쟁거린다. 알고 보니 내가 모셨던 상관님이 오 병장을 아오.
그는 북한군을 맨손으로 죽였다 하오.
즉 그는 사람을 맨손으로 죽인 자라오.
오 병장에게 모든 걸 맡기고 매달리시요.
매달리시요...
모든 걸 다 내던지고 오 병장에게 투항하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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