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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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8. 21. 03:51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숙희는 애써 침묵을 지켰다. 
그 동안 그녀는 동생이 살도록 돌봐주고 배신한 아빠에게 그래도 잘 살라고 말 한차례 보내고. 
그러나 그녀는 운진을 또 만나지 않았다.
같이 탄 설이가 숙희의 안색을 살피고는 시종 침묵을 지켰다. 
숙희는 눈치 빠르게 구는 설이가 고맙고 기특했다. 
   어차피 난 독신을 결심한 마당에 새삼스럽게...  
그래도 운진을 다시 만나고 보니 옛 생각이 떠 올랐다. 
   누구의 아이디어였건...
   성취 못할 일이었었기에 안 된 것이지 어느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라고 숙희는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바보같다는 생각을 했다. 
   실컷 때려줬어야 하는 건데! 이십년 만에 만나 본 그 남자는 대화 조차도 피하지 않았는가! 나 혼자서 괜히 설이를 핑게로 만나보려 했고 혼자 실망하고 있지. 
숙희는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척 했다.
그러다가 눈을 뜨고 설이를 찾았다. “참, 너 어떻게 공항으로 왔니?”
   “삼춘이 데려다 줬어요.”
   “그렇지, 참!” 숙희는 눈을 도로 감았다.
한참 있다가 설이가 숙희를 조심히 불러깨웠다. “아줌마?”
숙희는 대답은 안 하고 눈만 떠서 설이를 돌아다봤다.
설이가 작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삼춘이 적당한 기회에 드리라고...”
숙희는 설이의 손에 쥔인 사각봉투를 내려다봤다. 
겉봉에는 새삼스레 눈에 익은 필체로 숙희씨께라는 글자들이 씌여져있었다. 
   비록 이십여년전이지만 숙희는 운진이 때때로 싯귀들을 베껴 넘겨주던 필체를 기억해 냈다. 때로는 유행하던 팝송 가사를 번역해서 그럴 듯하게 자신이 지은 시라고 속이던 사람이 조카편으로 글을 보내는 의도는 뭘까 하고, 숙희는 그 봉투를 받았다.
   조카에게는 비밀도 없나 보지. 
   “적당한 기회가 어떤 땐데?” 숙희는 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말했다. 
봉투는 작은 크기인데 내용물은 얄팍했다.
숙희는 설이가 지켜보는데서 봉투를 뜯고 안에 든 내용물을 꺼냈다. 
이중으로 접힌 종이를 펼치니 제일 윗줄에 숙희씨께 라고 정성들여 쓴 글씨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숙희가 옆을 보니 설이는 그 새 눈을 감고 헤드폰을 끼고 있었다. 
숙희는 설이를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참고 편지로 눈을 옮겼다.
   “저의 가슴 속에 평생 박힌 말이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숙희씨께 미안하다는 그 말 한마디입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숙희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옴을 느끼고 창밖으로 눈을 잠시 돌렸다.
    “그래서 용서를 구합니다 
     용서를 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발 훌륭한 상대를 만나서 행복하십시요
     그러셔야 제가 죽어도 맘이 편합니다
     또 한가지 말 한마디는
     남자들이란 그래도 여자들한테는 왕노릇을 하고 싶어합니다
     아무리 못나도 그래도 남자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게 통상적일 것입니다
     그게 저의 이유 전부였읍니다
     밤새 종이 한장을 앞에 놓고 들여다보는데 
     할 말이 많았을 것 같아서 펜을 들었는데
     아무런 생각이 안 떠오릅니다
    설사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더라도 제 자신 말할 자격이 없는 놈임을 잘 압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적은 말이 지난 이십년 동안 제 가슴 속에 박혀 있던 심정입니다
    제가 만일 기다렸다고 했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입니다
    건강하십시요
    못난 운진 드림”
숙희는 그 종이를 도로 접었다. 
   진짜 못난 남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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