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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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8. 22. 04:32

   숙희는 정말로 아무런 생각없이 그와 헤어진 뒤 이십년을 바쁘게 살아왔다. 
그러던 그녀는 설이라는 여자애를 만나고 나서 부터 시계가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숙희는 하루종일 누웠더니 등이 배겨서 모로 누었다. 
잠이란 게 자면 잘수록 느는 건지.
   그 때 전화벨이 울었다. 
숙희는 눈을 감고 내버려두었다.
   ‘접니다. 오운진입니다.’ 귓전에 그의 음성이 들렸다.
숙희는 소스라쳐서 눈을 떴다. ‘응?’
설이가 수화기를 내민 채 곁에 서 있었다.
숙희는 머리를 잠시 흔들어 정신을 차린 후 설이를 올려다봤다. ‘뭐니? 안 나갔어?’
   ‘삼춘인데요? 아줌말 찾아요.’
숙희는 생전 보지 못한 수화기를 눈 앞에서 보고 설이를 다시 한번 올려다 봤다.
   ‘삼춘 지금 요기 오션 씨티에 와 있대요. 그래서 제가 아줌마 방을 가르쳐줬어요.’
   ‘니가 오션 씨티엔 왜?’
   ‘데이트 하는데 삼춘이 걸어오더라구요? 휴가라면서.’
수화기에서 운진의 음성이 들렸다. ‘접니다. 오운진입니다.’ 
   그의 음성은 높낮이가 없이 단조로웠다.
   ‘앗다, 싸게 싸게 전화 받으시요!’ 김선생의 음성이 들렸다.
숙희가 놀라서 돌아다 보니 머리가 허옇게 샌 김선생이 침대 곁에 서서 눈을 흘겼다.
숙희는 떠밀리듯 설이에게서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읍니다.’
   ‘숙희. 나야. 오랫만이군.’ 
운진의 말투가 전혀 생소했다. 그는 절대 반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숙희'씨'는 어디 가고.
   ‘왠일루...’ 숙희는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림으로써 반말 비슷이 했다.
   ‘잠깐 바다로 나오지. 파도가 너무 좋아!’
   ‘추울 텐데...’
   ‘내가 코트 가져왔어. 숙희가 갖고 싶어하던 까만 밍크 코트야. 평생을 모아서 하나 샀어.’
   ‘밍크 코트는 나도 있는데…’
   ‘그래. 그럼, 기다릴께.’
끄룩! 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숙희는 수화기를 설이에게 돌려주려고 주위를 살폈다. 
주위는 온통 모래사장이었다.
하얀  파도가 흰 이를 내보이며 무섭게 달려와 발 앞에서 사라졌다.
숙희는 팔이 차가워옴을 느껴 아! 하고 팔을 오무렸다. 
뭔가가 팔꿈치에 부딪히며 짱! 하고 금속성 소리를 냈다. 
   그 바람에 숙희는 눈을 떴다. 
주위는 불이 없어 어둑했다.
숙희는 팔을 뻗어 머리맡의 등을 켰다. 
   ‘어마나!’  
그녀는 자신이 한 짓을 알았다. 먹다 남긴 수프가 그릇째 엎질러졌고 마룻바닥에 스푼이 떨어진 게 눈에 들어왔다. ‘꿈꾸다가 팔로 쳤구나!’
숙희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화장실에서 걸레에 물을 적셔다가 등받이에 쏟아진 수프를 훔쳐내고 빈 그릇과 스푼을 집어들고 방을 나왔다. 
설이가 나가면서 어쩌면 집안에 불을 하나도 켜놓지 않았다. 
숙희는 불이란 불은 죄다 켜며 부엌으로 가서 손에 든 것을 싱크대에 던져 넣었다. 
   ‘아니지!’ 
그런 식으로 던져 넣는 게 아니었다. 
여자처럼, 여자답게 싱크대에 아주 얌전히 넣어야 했다.
   그는 여자 다운 여자를 원한다고 했다.
   '여자 다운 여잔 어떤 건데!' 
숙희는 제 머릿속에서 외쳐댔다. '호호 웃고 웃을 때 입 가리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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