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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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8. 25. 00:14

   이튿날 숙희와 운진은 영국을 곧바로 떠나서 스위스로 날아갔다.
거기서 그들은 딸 둘과 합류했다.
킴벌리는 이른 방학으로 시간을 냈고, 챌리는 회사에서 출장을 보내서 온 것이다.
거기서 킴벌리가 아빠한테 보다는 새로 생긴 엄마에게 달려갔다.
   마미! 하고,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챌리는 숙희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하셨어요?"
   "너어, 여전히 맘에 안 든다?" 숙희가 챌리를 흘겨봤다.
   "네? 왜... 요?"
   "킴벌리는 나를 마미 하면서 안았는데, 넌 인사만 하네?"
   "아. 내가 지금 몇살인데..."
   "어주. 너 몇살인데?"
   "저 몇살인지 모르세요?"
   "트원티 포. 트원티 쓰리?"
   "그니까요."
숙희가 여전히 맘에 안 든다고 고개를 저었다.
킴벌리가 새 엄마의 팔을 꽉 잡았다.
   "Having fun, or still kicking his butt? (재미있어요, 아니면 아직도 그를 혼내고 있어요?)"
   "Both. (둘 다.)"
   "오오..."
   딸 둘이 서로 마주보며 입을 가렸다.

   스위스에 와서 스키를 안 타보고 가면 간첩이라고, 그런데 운진만 활강스키를 잘 탈 줄 모른다.
   "니들은 언제 배울 기회가 있었니?" 운진은 딸들을 남 보듯 낯설었다.
딸들이 아빠에게 어이없다는 식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들이 묵기로 한 숙소가 스키장에 위치한 것이었다.
숙희가 멋진 스키 복장을 하니 서양 여자 못지않다.
그녀가 날렵하게 출발하고, 딸들이 뒤따라서 눈비탈을 쌩 날아 내려갔다.
운진은 나무로 지은 집에 갇혀서 세 여자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눈물이 날 때까지 지켜봤다. 
   문득 영란이 한 때 스키를 배우고 싶다고 한 기억이 났다.
그 때 무슨 일로 무산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냥 배우게 할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설령 스키를 배우겠다는 속셈이 골프 선생과의 불륜같이 스키 선생과 바람 피우려던 핑게였을 망정 하라고 할 걸 하는... 
미안한 후회가 아니라 그렇게 밖에 살지 못 하고 갈 걸 알았다면 스키건 뭐건 다 해보라고 할 걸 하는... 
뒤늦은 안타까움이다. 그러고 보니 영란은 딸들을 겨울이면 스키 강습을 보냈던 것 같았다.
운진은 초보자들 속에 섞여 짧은 코스 좀 타보다가 돌아왔다.
   숙희와 딸들이 벙커로 돌아온 것은 운진이 낮잠을 갖고 일어난 때였다.
세 의붓모녀는 눈에서 스키를 타고 왔으면서도 땀을 흘렸다.
게다가 세 의붓모녀가 한꺼번에 씻으러 들어갔다.
운진은 커피를 만들었다.
   벙커에서 내다보이는 창 밖은 눈이 시리도록 차라리 하늘처럼 새파란 눈비탈.
운진은 숙희가 입으라고 새로 골라준 스웨터를 걸치고, 여성들이 씻고 나오면 바로 마시라고 원두 커피를 뽑는다. 이게 영화에서 보던 그 멋진 행복의 한 씬(scene)인가...
   '오운진. 복에 겨웠다. 이게 뭐냐...'
집동네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신록의 오월일 텐데 지구를 삼분의 일 정도 날아온 스위스라는 나라는 케이블카를 타고 산정으로 올라가서 스키를 탄다.
   세 의붓모녀가 커피를 마시며 빵을 뜯으며 재잘재잘대는 광경이 운진에게 무척 낯설다.
그가 영란과 살았을 때는 대화라는 것이 없었다. 어쩌다 두어 마디 좋게 시작했다가도 종래는 서로 언성을 높이는 걸로 끝나곤 했다.
아이들도 한번에 말을 듣거나 움직인 적이 없었다.
지금은 새 엄마 숙희가 손만 뻗어도 킴벌리나 챌리가 얼른 집어서 건넨다.
   영란은 말이 고왔어도 짜증 섞인 신경질이었고, 숙희는 말이 무뚝뚝해도 자상함이 배었다.  
운진은 딸들이 숙희와 잘 어울리는 것에 안심이고 만족이었다.
두 성인남녀가 어떻게 어울릴 것인가는 둘째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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