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장호원, 숙희
숙희는 ROTC를 대학 4년 동안 받으면 졸업과 동시에 여군 소위로 임관될 것이라는, 더 나아가서 승진도 되고 우수한 두뇌의 육사 출신 신랑을 만날 수도 있다는 교련선생의 설명에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 군대란 것은 공포였다. 왜.
잊을만 하면 찾아와서 엄마를 괴롭히는 한 소령님이 두려워서.
이제 숙희는 엄마와 소령 계급 모자를 쓴 사내와의 대화를 다 알아 듣는다.
그의 말은 시작부터 끝까지 '발각되면' 모녀가 목숨을 잃은다였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모친은 시장에서 일수놀이 해서 버는 돈에서 얼마를 내놓아야 했다.
그러면 소령이란 이는 한번 더 엄포를 놓고 가곤 했다.
그래서 그녀는 군대라는 단어와 군복 입은 모습이 공포였다.
어느 날, 숙희는 엄마한테 울며 대들었다. 이제는 다 말하라고...
하지만 송 여사는 딸이 머리가 컸다고 말했다가 더 큰 화를 당하느니 딸에게 구박 받으면서도 입을 다무는 것이 모녀의 앞으로 남은 삶에 더 도움이 된다고. 그녀는 딸에게 사과하며 빌었다.
더 큰 화란 딸을 잃는 것이라고.
모녀는 서로 부등켜 안고 목 놓아 울었다.
송 여사는 숙희더러 엄마 걱정하지 말고 대학에 꼭 들어가라고 권했다.
그리고 모녀는 실컷 울고 난 후의 후련한 마음으로 셋집을 나섰다.
시장으로 일수 걷으러 같이 가는 것이다.
숙희는 시장 바닥에 큰 양푼채 놓고 파는 순대가 먹고 싶었다. "엄마. 나 저거 먹어도 돼?"
"순대 먹고 싶어? 그려."
송 여사는 마침 순대 파는 아줌마한테서 일수를 거둬야 했다.
마침 그 자리에 세 명의 청년이 쪼그리고 앉아서 순대와 쏘주를 먹는데. 모녀가 더 가까이 못 오니 하나가 야 야 비켜 물러나자 하는 것이었다.
숙희의 눈에 그 세 명은 대학생들 같았고, 여기 장호원 출신들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줌마. 여기서 기차 타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하고 셋 중 머리가 가장 장발인 학생이 물었다.
"서울 가려구?"
"녜."
"워쩌. 젊어서 고생이랍시고 무전여행인감?"
"아뇨." 장발 학생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옆의 좀 갸름한 얼굴의 학생이 뒤를 흘끔 하고는 숙희를 봤다. "데모 하고 도망 다녀요."
데모. 도망.
요즘 흔해 빠진 인용귀. 숙희는 비웃어 주고 싶은데 참았다.
장발 학생이 얼굴 갸름한 학생을 몸으로 밀었다. "자식하고는!"
세번째의 학생이 넌 제발 입 좀 조심해라 응 하고는 먼저 일어섰다.
숙희는 그 마지막으로 말하고 일어선 학생을 몰래 봤다.
끽 해야 대학 1, 2 학년. 그런데 키가 셋 중 제일 크고, 눈썹이 장난 아니었다. 그 눈썹 학생이 먼저 움직였고, 장발 학생이 곧 뒤따랐다.
순대 파는 아주머니가 얼굴 갸름한 학생에게 기차역까지 가는 길을 일러주었다.
그 학생은 오뎅 국물을 마지막 방울까지 비우고 일어섰다. 그리고 숙희를 훔쳐 보는데.
숙희는 정작 눈썹학생의 뒷모습을 봤다. 그런데.
숙희는 저도 모를 소름끼침을 맛보았다. 초면이지만 낯설지 않은 느낌. 아니.
우리는 언제고 다시 만나리라 하는 전률.
먼저 일어나 움직인 두 학생이 시장을 나서자마자 담배를 하나씩 꺼내 물었다.
"야, 운진아! 나도 하나 주라!" 얼굴 갸름한 학생이 종종 뛰어갔다.
눈썹 학생이 저고리에서 담뱃갑을 꺼내어 보지도 않고 내밀었다.
장발 학생과 눈썹 학생은 담배를 피우며 길을 이리저리 보는데.
얼굴 갸름한 학생이 뒤를 핼끔핼끔 돌아다 보는 것이었다.
숙희는 엄마가 비록 작지만 그래도 의지하듯 숨었다.
장발 학생이 계속 뭐라고 얘기하고, 눈썹 학생은 고개만 끄떡이는데, 얼굴 갸름한 학생은 둘을 번갈아 보는 사이 숙희가 있는 방향을 연신 핼끔거렸다.
'[소설] 두개의 세상 pt. 23' 카테고리의 다른 글
pt.23//1-6x006 (5) | 2024.10.02 |
---|---|
pt.23//1-5x005 (5) | 2024.10.02 |
pt.23//1-4x004 (0) | 2024.10.02 |
pt.23//1-3x003 (1) | 2024.10.02 |
pt.23//1-2x002 (2) | 2024.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