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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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사내의 쉼방 2024. 9. 18. 04:55

   땡쓰기빙 이브의 밤은 특히 땡쓰기빙 데이의 새벽은 거리들이 유달리 조용하다.
대부분 부잣집들이 드문드문 떨어져 들어선 변두리의 도로는 해만 떨어지면 차량의 통행이 뜸하다. 
더욱이 다들 들어앉아 있을 새벽의 그런 도로는 차량 통행이 전혀 없다.
그 길을, 그러니까 알트의 별장을 드나드는 아주 한적한 도로를 까만색 차 한대가 헤드라이트도 켜지않은 채 질주했다. 어쩌다 코너를 비추는 가로등 불빛에 그 차는 쏜 살보다 더 빠르게 스쳐갔다.
   정확히 같은 시각.
운진은 저도 모르게 눈이 확 떠졌다.
이유는 모르지만 이상한 직감이 들어서 절로 깬 것이다. 마치 불침번 보초가 깜빡 졸다가 확 끼치는 예감에 눈을 확 뜨고 근무 자세를 취하는 그런 능숙함에서처럼. 
그러나 그는 도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애들이 집에 같이 있는데... 사위들도 있겠지.'
   그는 어떤 형체가 눈 앞에서 자꾸 얼씬거리는 것 같은 착각에 눈을 도로 떴다. 
정확히 표현은 못하겠지만 어떤 인물 같이 느껴졌다. '내 이 고질병, 또 도지나 본데?'
순간순간 눈 앞을 스치는 어떤 환상을 보면 나중에 꼭 같은 장면을 목격하거나 아니면 어디를 갔다가 전에 이미 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착각에 고민하는 그런 고질병.
   '체! 내가 무슨 신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에잇!' 운진은 잠을 도로 청했다.

   지하실 벽시계가 네시를 훨씬 넘은 것을 연신 보며, 챌리와 킴벌리 그리고 개리 주니어와 제이콥은 와인을 나누었다. 이 집 두 사위는 장인이 안 보이는 것에 대해 아내들에게 감히 묻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아내들이 자려들지 않으니 같이 밤을 새고 있다.
   챌리가 따지고 보면 킴벌리보다 더 속이 상하고 있다. 이유야 어쨌든 아빠가 새엄마와 잘 안 맞아서 방황하는가 본데, 먼저 엄마는 다른 남자와의 문제 때문에 그렇다치고. 이번 새엄마는 제발 사랑 주며 살으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시부가 남편에게 흘린 얘기를 들은 그대로 결국 새엄마의 과거 때문에 아빠가 힘들어서 나가버린 건지...
   킴벌리는 처음부터 아빠와 새엄마가 안 어울린다고 여긴 축에 든다. 아빠를 얕보고 새엄마의 지난 과거 때문에 얕보거나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실상 킴벌리는 새엄마의 지난 일을 하나도 모른다. 
   '아빠는 결국 이모를 못잊어서 괴로운가 보다.' 킴벌리는 그런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빠가 그래서 결국 못참고 집을 뛰쳐 나갔나 보라고 미루는데, 아까 이모에게 전화 통화를 넣으면서 유도심문한 결과는 아빠를 마지막으로 접촉한 것이 결혼식 때 뿐이라고.
   개리 주니어는 이웃의 누구를 찾는다고 문 두드린 사내가 의심스럽다. 미국에서 그것도 야밤에 남의 집 문을 두드려서 누굴 찾는다는 애매한 헛소리를 했다가는 불법 침입죄로 총에 맞아도 싸고 아닌 말로 경찰을 부르면 걸리는데, 주니어가 느낀 바에 의하면 아까 그자의 문 두드린 자세가 혹시 틀린 집은 아닐지 걱정하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 낯선 사람이 문을 열어주었을 때의 난처함이나 당혹함을 완연히 나타낸 그런 것이었다.
   제이콥도 같은 생각을 했다. 문 두드린 사내가 당황한 척하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마치 아는 얼굴이 문을 열어줄 줄 알았다가 전혀 아닐 때 당황해서 돌아서는 그런 분위기. 그런데 제이콮은 안경 쓴 것에 비해 시력이 좋아서 집 앞에 정차한 낯선 차의 앞 번호판을 읽고 외워두었다.
나중에 시간 나면 면허국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조회해 보려고...
   그렇게 땡쓰기빙 데이의 아침이 밝았다. 
바깥 기온은 화씨 45도 정도. 평년보다 약간 따스한 날씨였다.
새벽녘에 정애가 벗고 잤더니 새삼스레 춥다고 운진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아예 그의 손 하나를 자꾸 끌어다가 젖가슴이나 배 언저리에 닿게 하려고 했다.
운진은 그녀가 그럴 때마다 가슴이나 주물럭거릴 뿐이었다.
   "숙희한테 암말 안 할께." 정애가 운진의 귀에다 속삭였다.
운진은 결국 일어나버렸다. "동침했다고 그럴려구?"
   "동침은 동침이지?"
   "맞소. 그것 갖고 우리 집사람에게 또 써먹으슈."
   "어차피 나한테 온 거 알텐데, 뭐?"
   정애가 운진을 강제로 눕혔다. "내가 권사님하고 만나서 얘기했는데. 그래서 권사님이 오 선생님한테 무슨 일 생기는 거 아시는데."
   "권사님은 또 누군데? 참! 공항 안 가나?"
   "아, 참! 몇시!"
   "엄마란 이가 색에 빠져서는, 쯧쯧쯧!"
   "거기가 잘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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