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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로 접어들며 해가 일찍 떨어지기 시작했다.숙희는 여느 때처럼 창원이 잠시만 같이 있자 해서 하교 길에 잠깐 다방에 들렀다가 집으로 오는데, 언덕길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창원이 걸음을 멈추며 숙희를 뒤로 가게 했다.   왜 선배 하고 숙희는 조그맣게 말했다.창원이 턱으로 전봇대를 가리켰다. 저기 또 숨어있네 하고.숙희는 옆골목으로 해서 가는 길을 안다.그래서 둘은 그 길로 부지런히 통과했다. 그 전봇대를 피해 가려는 것이다.둘이 부지런히 와 보니 그 그림자는 사라졌다.   "이젠 더 일찍 다녀야겠다."   창원은 주위를 계속 살폈다. "좀도둑이거나 노상강도면 안 되지."숙희는 집 안으로 들어서서 대문을 꼭 잠궜다.   창원은 언덕을 내려가며 뒷골이 자꾸 송연해짐을 느꼈다.그는 최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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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와 창원이 다니는 국립대학 내에도 술렁임이 왔다.등교길 정문이 닫히고 쪽문만 열어 놓은 채 수위와 김 중위와 조교가 학생들을 지켜보기 시작했다.숙희는 버스를 내려서 창원이 안 보이면 기다린다.창원도 숙희가 안 보이면 기다린다.그렇게 둘은 등교 때부터 붙어 다닌다.둘이 나란히 쪽문을 들어서는데.검은안경 쓴 이가 신문 접은 것으로 창원을 가리켰다.조교가 숙희더러 떨어지라는 손짓을 했다.창원은 그 안경에게로 가고, 숙희는 수위실 건물 옆에 가서 섰다.김 중위는 의식적으로 숙희를 외면하는 것 같았다.창원은 이내 숙희에게로 왔다.   "왜 그래, 선배?"   "무슨, 수상한 사람 보면 곧 신고하라나."둘은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걸 왜 선배만 불러서?"   "시빈데?"   "왜?"   "모르지."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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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대학들은 위수령이 내려져서 휴교인데, 숙희등이 다니는 국립대학은 정상등교였다.그런데 학생들의 여론을 염려해서인지 교련은 잠정적으로 쉰다고 했다.교정에 김 교관과 조교는 그림자도 안 보였다.검은 안경의 사내도 안 보였다.학생들은 되려 조용히 담소하며 수업도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숙희와 창원이 나란히 걸으며 정문으로 향하는데.어디서 귀에 익은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정애네 하고 숙희는 그냥 지나쳤다.창원은 머리를 숙이기까지 했다. "쟤 진짜 왜 저러지?"   "그러다 그만 둘 거야."그 날 정애는 숙희를 집에까지 따라오지 않았다.   "요즘 정애가 안 보인다?"   "응. 걔 요즘 바뻐, 엄마."   "뭐 하느라 바쁜데?"   "..."   숙희는 대답을 망설이다가 씩 웃었다. "남학생들 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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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는 늘 커피가 씨겁다고 안 좋아하고, 대신 쥬스를 시킨다.이 날 월말고사가 끝나니 다방은 만원이었다. 죄다 학생들로 가득 찼다.창원은 아무래도 틀리게 답 쓴 것 같다고 책 하나를 펼친 상태이고. 숙희는 메모지에 곡목을 적고 있었다. "이제 와서 보면 뭐 해, 선배."   "아니. 맞게 쓴 것 같네. 괜히 떨었네."   창원이 책을 가방에 도로 넣었다. "애들이 또 술 먹자 할 텐데."   "그럼, 나 집에 바로 갈께, 선배."   "그럴래?"   "술 너무 많이 하지 말구, 응?"   "그냥... 너 집에 데려다 주구 나도 집에 가야겠다."   "왜, 선배?"   "돈이 없어."   "잘 됐네."그래서 숙희는 신청곡 쓴 것을 구겨 들고 일어서려는데. 정애가 들어서서는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숙희는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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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 장군이랍니다, 장군님."한순갑은 돌아와서 보고했다.병장 운전병놈이 요정의 식모와 찝 안에서 히히덕거렸다는 말은 빼고.   "그... 왕손이라고 잘난 체 하는 그자가..." 정 장군은 김이 샜다.   "또 한 대는 운전병이 없어서 못 알아봤습니다, 장군님."   "그냥 가자. 수고했다."한편, 요정 안에서는 별 둘짜리와 계급 없는 군복이 술상을 벌이고 있었다.별 둘이 무계급에게 술을 권했다.    "심 중사가 청와대에 연줄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구먼?"   "그냥, 작은아버지십니다, 장군."   "작은아버지시라면, 직계지, 직계."   "근데, 그 냥반이 하도 청렴결백을 주장하셔서리..."   "암! 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지."   "맑아도 보통 맑으셔야죠, 장군."그 말은 웬만한 선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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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갑은 송 마담이 딸과 서울로 이사했다는 것을 가을에야 알았다.그렇다면 서울에 대학교들을 뒤져야 찾아진단 말.그리고 한 소령은 정 장군이 별 둘을 달고 환향 즉 수도권으로 다시 오려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약삭 빠르게도 찝 하나를 직접 몰고 정 장군을 만나러 전방 사단으로 찾아 갔다.   "장군님 돌아오시면 제가 모실 겁니다, 장군님!"   "오! 그래도 우리 한 소령이 의리의 사나이야."   "참! 사모님과 결별하신 거... 참으로 유감입니다."   "음... 고맙네."   "어떻게... 마음 정리되셨으면, 이 참에 아주 아리따운..."   "떽기! 이 나이에 주책이란 소리 들으려고?'   장군이 껄껄껄 웃고는 몸을 앞으로 했다. "어디... 참한 과부라도 봐 놨나?"   "장군님 명령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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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은 동료 선수와 한바탕 연습을 하고 난 뒤 체육관 걸상에 앉아 땀을 딲았다.같은 학년 같은 반의 동료가 창원을 툭 쳤다. "너 요즘 무슨 고민거리 있냐?"   "숙희 친구 정애라고 있는데."   "그 쪼끄만 애?"   "걔가 아무래도 겐세이 놓을 것 같은데?"   "글쎄, 니네 둘을 졸졸 따라 다니는 게 눈에 거슬리더라."   "먼젓번에 나 승단시험에 못 붙은 거... 숙희가 제 삼자가 보기에도 같잖고 우스우니까 김 교관하고 붙었는데, 난, 그냥, 내가 날 승단시험에서 탈락 시킨 것만 갖고 감정싸움으로 밀어 부쳤는데."   "그거 아직 결말 안 났냐?"   "물론 숙희가 김 교관하고 붙은 건 맞어. 그치만, 그 정애란 기집애가 지 친구이니까 우리 편만 들어줬어도 김 교관은 판정패 당하는 건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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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부터인가 학교에 검은안경 쓴 이가 아예 상주하기 시작했다.그리고 그자는 아무 학생이건 불심검문식으로 붙잡아 세우고 뒤졌다.창원과 숙희가 방과 후 나란히 걸어가는데, 그자가 불러 세웠다.그자 옆에는 김 중위가 싱글싱글 웃으며 서 있었다.창원의 몸수색에 이어 가방이 땅바닥에 홀랑 뒤집어졌다.숙희는 그자가 발로 슥슥 뒤지는 대로 주워 담았다.   "너 몇 살이냐?" 안경 쓴 자가 묻고는 김 중위를 돌아다 봤다.   "열아홉 신입생인데 몸매가 왔다요, 에!"   "열아홉인데 이렇게 커? 시집 가도 되겠다."   검은 안경의 사내가 숙희에게 턱짓을 했다. "네 가방도 열어라."그런데 숙희의 책가방 말고 따로 어깨에 멘 가방을 김흥섭이가 빼앗았다.창원이가 발끈하는 것을 숙희가 가로 막았다.그 가방 속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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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는 선배 학생들의 원망을 들으며 그래도 열심히 등교했다.창원은 여기 불려 가고 저리 불려 가서 사과하고 해명하느라 쩔쩔 맸다.자연히 둘 사이가 소원해졌다.정애가 그 틈을 타고 끼어 들었다. 정애가 창원에게는 숙희를 잘 달래보겠다 하고, 숙희에게는 이번 기회에 윤 선배를 풀어줘서 일단 모면하게 하라고 종용하고 다녔다.대학대항 태권도대회에서 창원이 제외되었다.김흥섭이 고의로 탈락시킨 것이었다.학교측에서는 어떻게 항의나 건의도 못 했다.   "괜찮아."창원은 되려 숙희를 위로했다.숙희는 미안해서 죽고 싶었다. "나 이제 선배 못 보겠어요."   "아냐. 그런 맘 갖지 마. 진실은 언제고 승리한다."   "다른 선배들이 저를 미워하는데. 학교도..."   "괜찮아. 그럴수록 우리는 용감해야 해. 안 그러면,..

pt.23//2-1x011 그 나물에 그 밥

그 나물에 그 밥   숙희는 야유회들 갔을 일요일날 시내에 잠깐 나가서 책방을 들렀는데. 누가 뒤에서 그녀를 툭 건드렸다.숙희는 얼른 옆으로 비켜섰다.   "보기보당 또 문학소녀인개벼?" 남자의 유별난 사투리.숙희는 고르던 책을 탁 놓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책방을 나섰다.   "어이, 나 좀 쪼께 보더라고?" 김흥섭 중위 특유의 코맹맹이에 비꼬는 말투.   챙피도 모르나 하고 숙희는 계속 걸어갔다.워커발의 찍찍소리가 잦아지고, 숙희는 저고리 단을 잡혔다.숙희는 그 손길을 때려서 치우게 하고 돌아다 봤다.   "아따, 나이도 어린 것이 싸납네, 잉?"    정복 차림의 김 중위와 교련 조교가 나란히 서서 빙글빙글 웃었다. "인물 베리겄네."숙희는 그 두 사람한테 겁 같은 것은 나지않았다. 한 소령님한테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