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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란은 그 사진을 남편의 책상 위에다 그냥 놓았는데 전화벨이 울었다. 혹시나 해서 달려가 받으니 친정아버지였다.    “너 왜 그리 경망하니! 엉? 엄마랑 식구들을 왜 다 불렀어! 너 인제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할 거냐! 엉? 너 오서방이 다릇게 나오면 어쩔래! 남자는 그 나이에 가끔 이상한 짓을 한단 말이다. 오서방 돌아오면 나한테 연락해! 내가 직접 물어볼테니까, 엉? 그리고 행여 뒤지거나 하지 말아라! 알았제? 남잔 뒤에서 조사하거나 뒤지는 걸 알면 곤조를 부린단 말이다!”영란은 친정아버지가 의외로 남편을 두둔하는 듯 하는 것에 의아했다. 엄마보다 아버지가 더 기가 막혀서 난리를 피울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조화일까 싶다.    ‘흥! 당신도 예전에 바람을 피운 기록이 있으니 옹호하는 거야,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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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근 이십년 전 운진은 숙희와 오션 씨티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한 뒤, 3년쯤 지나 그 때는 숙희가 그를 포기하고 다른 선남을 찾았으려니 하고 포기했다.그리고 어떤 여인과 어쩌다 우연한 기회에 한번 동침한 후 책임을 강요하는 그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여자네 집에서 경영해 오는 술가게를 맡았다. 여자네 집은 딸 둘에 아들 하나가 있는데, 아들이 워낙에 칠칠치 못했고, 부부가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누구든 그 집 사위로 들어오면 가게를 맡아야 했었다.    결국 머슴이나 진배없었다. 화원이나 했지 술장사에 소질도 없고 흥미도 없는 운진은 기계처럼 아침 9시까지 나가서 밤 11시까지 종업원 둘을 데리고 일주일에 6일을 일했다.    장사는 저절로 잘 됐다. 아내는 결혼 때 이미 임신이었고,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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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남편이 갑자기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다음날 오션 씨티에서 전화왔었다는 여동생의 말을 듣고 운진의 아내 영란(崔英蘭)는 여러가지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한달 전 영란은 친정엄마가 용한 한의를 알아냈다는 강요에 못 이겨서 진찰받으러 갔었다. 그것도 근 두 시간을 운전해서 버지니아 주까지 갔었다.젊은 남자 한의원인데 그녀에 이어 남편의 맥을 짚어보고는 고개를 연신 갸웃하더니, “취미생활로 뭐를 하십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런데 묻는다는 것이 마치 나무라는 투였다. 남편이 양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 하길래 영란이 거들었다. “뭐, 늘 가게에 나가 있으니깐 취미생활이나 운동 같은 거 할 새가 없죠, 뭐. 워낙에 바뻐서.”한의가 눈만 내리떠서 영란이 대리 기입한 운진의 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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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희는 집에 가면 아마 봉투에 든 돈 액수를 보고 놀랄 것이다. 보통 때처럼 이삼천불이 아니라 이날은 오천불을 줬다. 숙희는 그 나이 되도록 혼자 살면서 돈을 모으려고 아둥바둥대보니 의미가 없었다. 직장생활 이십 몇년에 돈은 대략 오십만불을 모았는데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정아 앞으로 달아 놔 줄까… ‘아홉살짜리가 어찌나 영특한지 정말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그 집은 조그만 차에 여섯식구가 어떻게 타는지 어쨌거나 잘 다닌다. 이날 따라 동생에게 차를 줘 버릴까 하는 충동이 생겼다. 정아가 좁아 터진 차 안에서 오빠들이랑 끼어 자고 있을 것을 상상하니 생각만 해도 안쓰러웠다. 숙희는 전화기를 정상으로 돌려놓았다.   공희는 다음날 일요일에 전화했다.    “으응. 난 언니가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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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는 동생을 포옹에서 풀어주었다.    “사실은 운진씨 소식, 들었어. 어저께...”   “뭐어? 어떻게!”   “그 사람의 조카 설이 기억나?”   “그러엄! 운서 언니 딸이잖아.”   “걔가 우리 은행에 취직했어. 그래서 알았어.”   “희한하네! 걔가 또 왜 언니 회사에 취직을 해?”   “누가 아니. 그래서 세상을 좁다고들 하나 보지.”   “그러네에. 차암. 희한해, 응?” 그러면서 동생은 구체적으로 안 묻는다. 물었다가 행여 언니의 마음이 상할까 봐 배려를 해서이다. 숙희는 그런 느낌을 전달받고 오늘은 마음속의 말을 해버렸다.    “우린 바뀌었어. 니가 언닐 했어야 되는 건데, 이거 크게 잘못됐어.”   “허엉? 그게 또 무슨 소리야, 언니?”   “니가 더 언니 같다구! 내가 동생같이 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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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는 동생에게 늘 미안하다. 언니이면서 동생으로 하여금 엄마를 보살피게 하고 있는게 늘 걸린다. 엄마이기나 하면...따로 사는 모친은 그 짜증스런 성격으로 하루에도 몇번씩 공희를 오가게 한다고. 한밤중에도 불려갈 때가 있는데 동생의 신랑 차서방도 참 무던한 사람인지 운전 못하는 아내를 군말 없이 태워다 주고 태워 오고 장모가 부르면 지체없이 달려간다고. 그러면서도 부부의 우의가 보통 돈독하지가 않다고.   자매는 마치 싸운 사람들처럼 암말않고 앉아서 무릎들만 내려다 봤다.     “니 신랑이랑 왔니?” 숙희는 뻔한 걸 인사치레로 물었다.    “그러엄, 당연하지이. 언니두 차암.” 공희가 반가히 대꾸했다.     “같이 들어오지 않구?”   “처형 혼자 사는 집이니까, 들어오기가 좀 뭐한가 봐. 안 들..

pt.1 2-1x011 2000년의 9월

2000년의 9월   운진 그가 호텔에 투숙한 그날부터 동해안 일대에 비가 왔다. 미국의 동부지방은 해마다 여름이 무르익어가는 6월부터 겨울로 접어드는 11월까지 허리케인 시즌을 맞는다. 남대서양에서 발달한 열대성 저기압이 북상하다가 북반구의 찬기운을 만나면 태풍으로 변한다고. 많은 경우 먼 바다로 지나가지만 때로는 육지에 상륙해서 많은 피해를 주기도 한다고. 이 해 태풍의 이름이 9월인데 벌써 K자를 얻었다. 해마다 영어 알파벳 순서로 태풍에 이름을 붙이는데 K라면 알게 모르게 벌써 제법 되는 횟수의 저기압이 발생해서 지나갔다는 얘기가 된다.    운진은 밥 먹으러 나갔을 때 한번 그리고 저녁에 맥주를 사러 나간 것 외에는 하루종일 호텔방에서 뭉갰다. 그는 TV만 지겹게 봤다. 그리고 그는 웬지 일기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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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배달되어 온 음식을 부엌으로 가져와서 꺼내보니 제법 꼼꼼히 담아왔다.    ‘단골이라 이거지!’ 숙희는 픽 웃었다. 숙희는 음식을 대충 꺼내놓고 먹기 시작하며 설이가 처음 서슴없이 내뱉은 말.    ‘He’s dead. (그는 죽었다.)’ 그리고 누가 묻든지 '그렇게 말하라' 고 할머니가 시켰다는 말. 그리고 ‘How do you know my uncle? (우리 삼촌을 어떻게 아세요?)’ 하고 묻던 말,    ‘You know he’s a married man? (그가 결혼한 사람안 것도 아세요?)’ 말 등등을 곰곰히 되새겼다. 그녀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년 만에 듣는 그의 소식인데. 그것도 처음엔 '죽었다' 고 들었는데. 숙희는 의외로 담담했었다.   ‘뭔가 있다!’ 숙희는 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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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전. 결혼을 철저히 반대하는 모친을 설득하다가 실패하고, 숙희는 한 남자와 같이 오션 씨티로 달아났다. 그 때가 1980년 노동절날이었다. 둘은 호텔 방을 하나 얻어서 투숙하고는 밤새 부등켜 안고 울었다. 숙희가 둘은 부모 허락 없어도 결혼할 수 있는 법적 나이이니 둘이서 식을 올리자고 아무리 종용해도 운진은 평생에 한번 하는 결혼을 그런 식으로는 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반드시 나중에 후회할 거라는 것이 그자의 주장이었다. 일단 헤어져서 양 부모를 진정시키고, 특히 양쪽 모친들을 설득시키고 나면 기회가 닿는대로 다시 거론해서 양가 축복하에 결혼식을 올리자고 굳게 약속했다. 그때까진 서로를 찾지 말자는 좀 어색한 약속을 하면서 누구든 먼저 허락을 받은 쪽이 노동절날에 이곳 호텔 방에 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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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는 금요일 오후의 러쉬아워를 불평할 새 없이 그 집 식구들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차서 어떻게 집에까지 왔는지 콘도 앞에 다 와서야 알았다. 그녀는 벌티모어에서 남동쪽으로 연결된 97번 고속도로와 이어지는 항구 도시이며 메릴랜드 주의 수도인 애나폴리스 시 외곽의 한 고급 칸도(Condominium)에 혼자 산다.  그녀가 훌륭한 저택을 소유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콘도에서 사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혼자 살면서 개인집을 가지면 손 갈 일이 너무 많다. 많은 독신들이 한달에 한번 관리비만 내면 실내 수리도 와서 해 주는 칸도를 선호해서 거기서 산다. 일주일에 한번 오는 개인집 전문 청소회사가 배큠도 해주고 먼지도 털어주고 꽃에 물도 주고 화장실도 딲아주고 욕실 빨래는 세탁기에 넣어주기만 한다. 옷은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