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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가 얼른 손에 든 셀폰을 폈다.    “응, 엄마?” 설이가 응답하며 몸을 돌려 뒷방향을 봤다.숙희는 그 쯤에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남매가 큰소리로, “안녕히 가세요!” 했다.숙희는 얼굴만 돌려 가볍게 미소로 답변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애들이 다 들리게 누군가에게 인사를 했으니 엄마란 이가 누구냐고 물을 테고. 그러면 설이가 누구라고 설명을 할 테고. 그러면 숙희가 고의로 운서언니를 피한 게 돼 버린다. 숙희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뒤를 돌아다 보니 남매는 반대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설이는 여전히 셀폰을 귀에 댄 채였다.    ‘보나마나 누구를 만난 줄 아느냐고 설명하겠지...’ 숙희는 기분이 괜히 찝찝해졌다.마잌이 흘낏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숙희가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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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닷새째. 숙희는 모처럼 만에 활짝 개인 날씨를 놓치기 싫어 나들이를 했다.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자니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약해질 거라고 판단한 태풍은 내륙 지방으로 들어와서 폭우만 동반하고 죽을 줄 알았는데. 그 스톰은 펜실배니아 주를 북서로 관통하고 5대호의 하나인 이리(Erie)호에 가까이 가서는 캐나다에서 내려온 한랭 전선과 부딪혀 다시 그 파괴적인 폭풍으로 살아났다. 흔히들 죽어가던 풍속이 물 위를 만나면 미끄러워서 다시 가속된다고 한다. 그 폭풍은 갑자기 그 진로를 서쪽으로 바꿔서 물 건너 디트로이트 시를 때리고 미시건주를 지나 캐나다까지 가서 비를 엄청 퍼붇고는 기세가 죽었다고. 그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결같이 태풍이 육지에 들어와서 죽을 거라고 예측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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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란이 모르는 게 있었으니 운진은 초창기부터 처제를 한집에 데리고 있는 게 싫었다. 당시 스무살 갓넘은 여자가 차림새가 보통 흐트러진 게 아니었다. 여름이면 아예 브래지어도 안 해서, 유방이나 작나, 젖꼭지가 셔츠로 튀어 나오고, 운진은 더우면 벗어 제껴야 하는데 처제가 있으니 맘대로도 못 하고 겸사겸사해서 아내를 들어앉히고 처제를 쫓아보내려 했었다. 영란이 남편인 운진을 멀리 했을 때 가게에 일손이 필요해진 운진은 울며겨자 먹기로 처제를 데려다 가게 종업원으로 썼다. 운진은 아내가 가까이 오지 못 하게 하는 동안 솔직히 다른 생각도 즉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돌린 것은 사실이었다. 눈길만 돌렸지 정작 외박한다거나 바람 피운다는 것은 상상도 안 했다. 그의 눈 앞을 어지럽히는 데에 한몫한 이는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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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시반에 비싼 꼬냑 한병을 들고 온 사위를 장인은 반기는데 장모가 시쿤둥하게 대했다.  영란이 둘의 밥상을 다시 차려 같이 먹으면서 남편에게 계속 말을 했다. “오늘 매상 괜찮았어요? 애들은 지들끼리 자요. 내가 글쎄, 전화로 기도 해주고 자장가 불러주고 했다니까? 영아년이 집에 가서 밥 해서 다 먹였대요. 잡채 내가 한 건데, 맛있어? 와아, 이 꼬냑 맛있다.”    그리고 영란이 남편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며, “자기, 우리 가게 보통 때는 아홉시, 주말에만 열시, 그렇게 해요, 응? 이제 우리가 뭐 한푼이라도 더 팔아야 먹고 사는 건 아니잖아요?”    당신 몸생각해야 한다고, 그래서 그렇게 하자고 졸라댔다.   “나야 뭐 좀 일찍 끝나면 좋지, 뭐.” 운진은 찬성도 반대도 아닌 답변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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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진은 아내가 도착할 때까지 형록의 진의를 확실히 알아놓자 해서 말을 더 시켰다.   “야, 니 눈에 내가 처갓집살이 하냐? 허, 자식, 자존심만 남아서. 잘 생각해. 잘 생각하고, 좀 있으면 우리 집사람 나오는데. 생각 있으면 말해. 다리 놔 줄께.”   “예? 다리요? 누구랑요. 형님 처제랑?”   “그래.”   “아, 정말 왜 이러시나, 형님! 그만해요, 예?”   “야, 내 보니깐, 처제가 너한테 맘이 있어.”   “또! 한번만 더 해요, 그 말. 나 당장 그만둘 거요!”   “노티스(Notice)도 없이 그만둬? 응, 잘해 봐. 그렇게만 해.”   “그러니까 처제 얘기 그만해요, 진짜!” 운진은 형록이 펄펄 뛰는 걸로 봐서 처제하고는 안 될 것 같았다. 형록의 기색이 보통 싫어하는 게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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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형님, 처제는 오늘, 결근이예요?”형록의 그 말에 운진은 모른다고, 알고 싶지않다고, 고개만 저어보였다. 그는 말을 꼭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해 봤다. 그래도 집안 일인데.    ‘혹시 이 자식은 아니겠지. 처제가, 시발, 언니 가게에서 돈 훔치는데, 쌩판 남인 이놈이야 부담있나?’ 운진이 복권 찍는 아줌마한테 어디 캐쉬어 일할 사람 좀 소개하라고 말한 뒤 뒷방 사무실로 가려는데 형록이가 운진을 불러 세웠다.    “사람은 왜요, 형님?”   “그냥 필요해서. 너 짜르는 거 아니니깐 걱정 마.”   “처제 대신이예요?”   “그래!”   “내 그럴 줄 알았지.”   “뭘 니가 그럴 줄 알어, 임마. 너 뭐 아는 거 있어?”   “처제 진짜 안 나오죠?”   “그래! 안 나온다, 됐냐? 왜, 보고 ..

pt.1 5-1x041 2000년의 가을

2000년의 가을   숙희는 운진과의 데이트가 비록 짧았었지만,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늘 기억에 또렸했다. 날짜까지도 정확히 기억할 수 있고. 그녀는 그래서 비만 오면 그가 생각났다. 또 그와 데이트하며 같이 사 먹은 음식이 꽤 많았어도 그 때 그가 양보한 그 짬뽕의 맛이 지금도 입에 남아있다.    ‘왜 나를 찾으려 하지 않았을까? 얼마를 기다리다가 다른 여자와 짝을 맺은 거야. 난 지금도 기다리는데. 나를 그렇게 몰라.’그녀가 만일 운진 그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그는 아마도 숙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전하는 그런 과정을 힘겨워할까 봐 그랬는 지도 모르겠다.   그는 만나던 동안에도 숙희가 힘들어 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중에는 집에서도 좋아하고 더 나은 장래를 보장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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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운진은 번민에 빠진 사람처럼 숙희의 말에 계속 딴 소리만 했다. 그걸 숙희는 재미있어 했다.아까부터 이쪽을 자꾸 훔쳐보던 정(鄭)이란 자가 기여코 옆에 옮겨 와서 숙희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운진은 정에게도 꿀린다. 정은 예일인가를 나와 그 때 이미 회계일을 시작했고, 딸을 가진 제법 괜찮은 집들에서 군침을 삼키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는 뒤로 듣기에 여자 문제가 지저분했다. 운진은 저는 숙희와 안 되더라도 정가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를 무안줘서 보냈다.    “왜 사람을 무안주고 그래요? 그거 아주 안 좋은 습성이예요, 운진씨.”   “저기요...”    운진은 목소리를 낮췄다. “저 사람은 평이 안 좋아요. 그래서.”   “운진씨!”   “녜.”   “그건 나를 바보로 취급하는 건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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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는 운진의 등을 밀어 버스에 태웠다. 둘이 버스 안의 맨 뒷자리로 가니 주위가 텅 비었다. 사람들이 앞으로 다 타고, 뒷좌석에는 숙희와 운진만 남기고, 버스가 거칠게 출발했다.숙희가 그를 옆에서 쳐다보는데 운진이 자꾸 외면을 했다. 그는 골이 난 표정이었다. 숙희는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느낌에 앞을 쳐다봤다. 운전석 머리 위의 거울로 성렬이 숙희를 훔쳐보고 있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눈길을 돌렸다. 그래서 그녀는 자리를 창가로 옮겼다. 그리고 운진에게 옆으로 오라고 시트를 건드렸다. 그가 미적거리며 옮겨와 앉았다. 그는 무안한 지 자꾸 다른 쪽을 보려 했다.   “미스터 오.”   “녜?” 그가 얼른 돌아다 봤다.   “졸업하면 뭐 하실 거예요?”   “네에... 사실 그것도 애매해요. 막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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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는 그 때 다시 한번 역시 그는 순진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어딨어요?” 그녀는 그렇게 부드러운 말을 던졌다.둘이 따로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다가 숙희가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동생이 먼저 가야될 거 같애요?” 운진은 눈만 껌뻑거렸다. 한참을 그러더니, “시집뇨?” 하고, 그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럼, 무슨 얘기하는 줄 알았어요?”   “언니이, 는, 어떡허구요?”   “언니가 늦다고 동생까지 막을 순 없죠. 안 그래요?”   “어, 그래두 돼나?” 하는, 운진의 얼굴이 빨개졌다.숙희는 그의 빨개진 얼굴을 봤다.    “동생이 몇살인데, 그렇게 빨리 갈려구 해요? 언니두 아직 그냥 있는데...”   “시집 갈 나이 됐어요. 그리고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