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2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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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로 운진은 저녁 때부터 만일 장모가 아이들한테 뭐라 하기만 하면 꽥꽥 소리를 질렀다.    당연히 그의 장모도 지지 않고 맞고함을 질러댔다. 그러나 운진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워낙에 거칠게 나가니 그 거센 장모가 주춤했다.   “에잇, 씨팔! 이거 어디 먹겠나! 얘들아, 먹지 마라! 내 차이니스 푸드 시킬께.” 그게 운진의 시작이었다. 아이들은 갑자기 달라진 아빠의 언행에 눈들이 휘둥그레졌다.   “오늘 배큠을 한 거요?” 라든지, 아니면, “빨래는 겉옷 속옷 구분해서 빠슈!” 그리고, “장은 일주일에 한번 볼 거니까, 미리미리 적어놨다가 주말에 시장볼 때 나한테 주고, 행여 챌리가 운전한다고 툭 하면 시키거나 학교에서 오는 길에 뭐 사오게 하지 마슈. 걘 졸업반이라 학교일이 많아요. 알았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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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가 쟁반에 담아온 찻잔을 삼촌 침대 머리맡에 놓았다. 운진은 향을 이미 맡았으면서도 조카를 봤다. "그건 뭐냐?"   “생강차예요.”   “오, 그래. 고맙다.”   “요즘 감기가 무섭대요. 식기 전에 드세요.”   “그래, 고맙다.”설이가 찻잔을 내려놓고 바로 나가지 않고 우물우물거렸다.   “뭐, 할 말 있니?”   “네, 저기요. 아무래도 제가 취직을 해야 할까 봐요. 집에...”   “내가 아파트 세는 대준댔는데, 왜 엄마가 또 일을 그만두었니?”   “아뇨, 그건 아닌데요.”        “지금 여기 있는 게 싫어서?”   “아뇨, 그건 아니구...”   “용돈이 더 필요하니?”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괜찮아. 얘기 해봐.”   “그 아줌마가요, 먼저 캘리포니아로 오면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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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if I was interested in that woman, I would keep that picture in my... wallet. (만일, 만일 내가 그 여자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나는 그 사진을 내... 지갑에 간직했겠지.)"아빠의 말에 킴벌리가 휴지통을 내려다 봤다. "She looks ugly. (그녀는 못 생기게 보여.)"   "Exactly! (그러니까!)"아빠의 지나친 맞장구에 딸 둘은 암말 없이 서로를 마주 봤다. 그러고는 둘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런데 챌리가 묘한 표정으로 제 아빠를 몰래 훑어보는 것이었다.    아빠 몰래...   운진은 집에서 TV의 뉴스를 눈으로 보고 챌리의 옆에서 빠르게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를 귀로 들으며 딸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나 궁리를 했다. “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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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에 평소 종교심이 많은 복권 아주머니가 있는데 그 아주머니가 색다른 말을 했다.    “사장님 잠깐 들어가 계셨을 때 찾아왔던 여자분은 누구지요? 굉장히 세련되고 많이 배운 이 같던데.”    ‘숙희씨 말이구나.’ 운진은 대답을 피했다. ‘그 여자는 안 되지! 내가 도저히 감당 못 하지.’   "사장님 걱정을 많이 하던 눈치던데..."   “아줌마 교회에 참한 과부들 없어요?”   “있죠오! 노처녀들도 많아요. 마흔이 되도록 시집 못 간 처녀들도 많이 있어요.”   “아줌마 보시기에 참한 여자 하나 소개시켜 주십쇼. 살림 잘 하는 여자로.”   “그러지요. 진작에 생각을 고치실 것이지!”운진은 부탁은 해 놓고 쑥스러워서 얼굴을 붉혔다.   쇠뿔은 단김에 빼라했다며 그 아주머니가 그 다음 날로 당장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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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리가 남자친구를 아빠에게 보인다고 데려왔다. 부모가 유대인인 갈색 머리의 동갑내기 같은 대 학생이었다.  운진은 챌리가 이제 스물둘 되는데 벌써 남자친구 타령인가 했다가 하긴 여긴 미국이고 여기서 태어난 애들이니까 하고 생각을 고쳤다.    그 청년은 동양남자가 약간 유창한 영어로 인사를 건네니 안심했는지 아주 예의 바르면서 활달하게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챌리를 좋아하게 된 동기가 그녀의 신비스러운 미소 때문이라고 했다. 챌리는 슬픈 감정을 숨기려고 애써 즐거운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그 은은한 미소가 정통 백인 계통인 남학생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고 했다.   그 남학생이 돌아간 후 운진은 생각에 잠겼다. ‘너무 기울어지는데... 잘 될래나?’설이가 삼촌과 둘이만 남게 되자 다가왔다.운진은 아랫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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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지났는데 설이에게서 삼촌에게 연락이 왔다.    “그 분이 떠나신다면서 집으로 전화를 하셨는데요?”   설이는 그녀가 말한 것 보다 왜 일찍 떠나나 하는 말투였다. "원랜 구정 지내고 간다더니..."    “어, 그래애? 변호사빈 뭐라대?”   “변호사비가 오천불이래요. Five thousand.”   “오천! 싸네. 근데, 어디로 보내라든?”   “저한테 이-메일 주소만 주셨어요.”   “어, 응, 그래, 불러 봐.”   "삼촌한테 드리지는 말고, 돈 받으면 이-메일 하랬어요. 그 때 가서 보낼 주소를 알려준..."   "알았다."운진은 조카와 통화를 마치고 조금 갈아앉았던 것이 도로 잡쳤다. '진짜 문제 있는... 아줌마네? 혼자 사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병인가? 뭘 그렇게 가리는 게 많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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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에 연락드렸어야 하는 건데, 제가 좀 칠칠맞다 보니 늦었습니다. 용서하십시요.”운진의 그 말에 숙희는 하마터면 꺄아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경우야 다르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용서해 달란 말이 그녀로서는 아닌 말로 평생 기다린 말이었다.그러나 그녀는 시침뗐다. “뭐, 모르셨다 해도 전 내색하지 않을 작정이었어요.”   “어, 그러면 안 되죠! 그러면 제가 평생 나쁜 놈이 되죠!”   “어차피 저한테 잘 하신 건 없잖아요?”   "..."숙희는 상대방이 잠자코 있는 것을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운진이 한참 후에 말을 떼었다. “여전하시네요...”   “뭐가요?”    숙희는 웃으려다 말았다. "뭐가 여전하죠?"   “남의 감정을 후벼파는 거 말입니다!” 운진의 말투가 약간 토라진 듯이 들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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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진은 사나흘을 고민한 후 설이에게 숙희의 연락처를 물었다. 설이가 '그 분이 가르쳐주지 말랬다' 며, 망설이다가 숙희의 전화번호를 주었다. 운진은 숙희의 전화번호를 받아 적으며 새삼스럽게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 쪽지를 주머니 안에서 하루 종일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일반 근무자들의 퇴근 시간을 넘겼다.    그는 가게를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 차 안에서 셀폰으로 숙희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혹시나 음성 메세지를 남길 수 있으면 인사치레나 하리라. 그러면 다음날이나 언제고 듣겠지 하고 신호음이 들리는 셀폰을 귀에다 댔다.   숙희는 사무실 창 밖의 야경을 내다보고 있었다.그녀는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그 동안 정든 이 방은 물론 낮이나 밤이나 내다보며 눈의 피로를 풀곤 하던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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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운진은 조카설이에게 전화를 걸었다.설이가 처음에는 말을 안 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결국 삼촌의 강권에 못 이겨 들려준 말...   설이가 회사의 합병으로 일자리를 잃게 되고, 답답하고 궁금도 하고 해서 지나가는 길에 들렀던 삼촌의 술가게는 그의 처제가 보고 있었다고.    영아는 사돈인 설이를 뒷방으로 데려가 형부가 어떤 자의 머리를 돌로 때려 구속되었다고 말해주었다고. 그리고 형부가 변호인 선정을 거부한다고 말해주었다고.   그로부터 며칠 지난 뒤 설이는 숙희가 전근 가기 전에 잠깐 보자고 해서 나갔다고. 그 자리에서 설이는 며칠째 밤새 울어댄 엄마 때문에 잠을 못자 퉁퉁 부은 얼굴로 숙희에게 들켰다고.    “삼춘이, 사람을 때려서 랔덥(갇히는) 됐대요.”숙희는 그가 그럴 리가 없다고, 그럴 ..

pt.2 2-1x011 20년 만에 얽힌 통화

20년 만에 얽힌 통화   “건배!” 형록이 술잔을 들었다.한동안 적막했었을 집에 소음이 퍼진다.운진은 술잔을 들면서 곁눈질로 챌리가 어떻게 나오나 훔쳐봤다. 챌리는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들여다만 봤다.   “마시자, 챌리야!”   “와아! 웬일이세요?” 영아가 탄성을 질렀다.    “나도 몰라. 난 뭐 잘 한 게 있다구.”챌리가 예쁜 눈으로 아빠를 바라봤다. “아빠, 저 마셔도 돼요?”   “먹어, 먹어!”   "잘 돌아가는 집안이다!"    형록이 운진과 술잔을 부딪쳤다. "인제 뭘 좀 아시네."   "어차피 나 없는 동안 또 술 먹였을 거 아냐?"   "오! 아냐, 아빠! 나 술 안 먹었어!" 챌리가 두 손을 내저였다.킴벌리가 헤헤헤 하고 웃었다.   "또 이모 내가 다 뒤집어 쓰네."영아가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