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개의 세상 pt. 02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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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진은 무식하게 보이도록 와인을 단숨에 비웠다.    '쪼매만해도 당신보다 컸겠다!'    맛은 없고 달기만한 와인은 끈끈한 느낌을 남기며 목을 타고 내려갔다. 포도색 물에 알콜을 탄 듯한 가짜 와인 같았다. 바가지 아닌가, 혹시...정 여사는 눈을 내리깔고 와인을 조금씩 음미하고 있었다. 그녀의 낮게 뜬 눈이 마치 웃는 듯했다. 아마도 와인을  물 마시듯 해치워 버린 그를 비웃는 모양이었다. 운진은 그걸 바랬다. 그녀가 운진을 얕보거나 무식하다고 무시해 주길 바랬다. 그는 무식하게 트림까지 했다. 이제 그녀는 민망해서라도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전혀 그런 기색을 안 하고 와인을 입술에 적셔 맛을 보며 글래스를 내려놓았다. “싱겁네요?”운진은 눈만 내리떠서 빈 글래스를 봤다. ‘와인이 싱겁다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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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일곱시가 되었다. 운진은 형록에게 전화를 해서 잠깐 오라고 말했다.영아가 몹시 부른 배를 손으로 받치고 가게로 들어왔다. 그녀의 배는 유난히 불렀다. 운진은 자꾸 쌍동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 아니, 힘드실 텐데. 형록이 바빠요?”   “금방 올 거예요. 잠깐 뭣 좀 치우느라구. 어디 가 보셔야 해요?”    영아가 카운터 뒤로 들어섰다. 그녀의 그렇잖아도 풍만한 유방이 임신을 해서 더욱 크게 보였다. 그녀는 뒷방을 기웃거렸다.운진은 속으로 자신을 꾸짖으며 카운터를 나왔다.    ‘아서라, 임마! 잊어!’ 그는 정 여사를 위해 가겟문을 열어잡았다. 정 여사가 가벼운 동작으로 문을 나섰다.   “원래는 제가 갖다드려야 하는 건데, 오시게 까지 해서 미안합니다.”   “아니예요. 바쁘신데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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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주어진 시간표대로 모두에게 정확히 흘렀다.폴이가 세발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 시작하고 영아의 배가 또 점점 불러왔다. 그래도 그녀는 가게에 이제는 정식 남편인 형록과 함께 열심히 나왔다. 인물 좋고 영어도 능통한 영아가 캐쉬어 일을 보고, 형록이 앞치마를 두르고 쿸을 하고 두 사람은 열심히 장사했다.그들은 아직 정식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지만 열심히 살았다.   그들은 운진에게 돈도 꼬박꼬박 갚아 나가며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    운진의 마음도 진정되고 이제는 영아를 보더라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폴을 보더라도 안아보기만 해 줄 수 있는 감정 다스림이 배겼다. 그런데 챌리와 킴벌리는 폴을 무척 귀여워하고 가게에만 나오면 집에 들어갈 때까지 아예 아이를 번갈아 데리고 놀았다. 딸들은 사촌으로 사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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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진은 책방 여인 외에도 다른 여인과 비정규적인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역시 돈이 얽힌 관계로 연락을 주고 받기 시작하다가 여자쪽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대쉬하는 바람에 조만간 깊은 만남을 기대해도 좋을 만큼 분위기는 무르익은 상태였다.책방 김 여인은 서로의 가게가 쉬는 날인 일요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데이트를 하는 것으로 못 박았으니 주중에는 피차 전화 안부만 주고 받는다.반면 또 하나의 여인 정 여인은 운진의 가게를 수시로 드나들기 시작했다.사람이 뭐에 미치면 주위의 충고가 귀에 안 들어온다.운진은 복권 찍는 아주머니의 말을 귀흘려 들었다.   '그 여자 크게 치고 다니는 사깃군' 이라는 말을...캐리아웃을 담당하는 아주머니도 두어차례 말하려다가 운진이 전혀 듣지않자 혀를 차고 물러섰다.   운진의 그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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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늦은 시간인데도 다이너는 젊은이들로 메워지다시피 꽉 찼다. 하이스쿨 다닐 만한 무리가 한자리를 차지했는데, 한 소녀가 셀폰에다 통사정을 하고 있었다.    “Mom! I will! Please? We are in Diner now. Yes, mom! Okay! Bye! Love you! (엄마! 할께! 제발? 우리 다이너에 있어. 응, 엄마! 알았어. 빠이! 사랑해!)”    그 소녀가 셀폰을 접고는 쉬시! 하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I gotta get home by midnight. Or My mom’s going to ground me! (나 자정까지 집에 가야 해. 아니면 엄마가 날 그라운드 시킬 거야!)”일행들이 오오! 하고 동정의 신음을 냈다. 한 소년이 의자에서 몸을 반쯤 일으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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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는 밖에 나왔다가 도저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극장 안이 떠나가게 웃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그 웃음소리가 그녀의 닫힌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열어갔다. 숙희는 그 영화관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녀가 나머지를 보는 동안 무엇보다 숙희의 바로 뒷자리에서 들리는 어린 아이의 그 히히히히 라든지 헤헤헤 하는 웃음소리가 숙희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다. 영화는 어쨌거나 처음 남녀의 재상봉인 해피 엔딩으로 끝났다.   영화가 끝나자 그 어린 소년이 이렇게 말했다.    “Hahaha! The movie was so hilarious, mom! I couldn’t stop laughing, mom! Hey, mom. Can we get this movie tape when they start se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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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설이의 데이트가 큰 버켓의 팦콘과 마실 것 세개를 컵들이에 들고 돌아왔다.설이가 땡쓰 하고 팦콘 버켓은 가운데 앉은 제 무릎 위에 놓고 마실 것을 공중에 쳐들어 무슨 종류인가 식별하고는 각자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남자는 제가 사 와  놓고도 설이가 나눠주는 대로 받았다.그런 게 숙희에게는 생소했다.    과거에 운진과 데이트할 때는 그가 주로 궂은 일을 하고 숙희는 가만히 앉아서 받기만 했다. 숙희가 지금 곁눈으로 지켜보니 설이가 팦콘도 한주먹씩 집어서 남자의 입에다가 대 주었다. 그러면 남자는 팦콘을 받아먹으며 때로는 설이의 손가락을 무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 설이가 아이이! 하고 놀라는 시늉을 하고, 둘은 키득키득 웃었다. 그 새 둘 사이에 진도가 많이 나간 모양이었다.숙희는 평소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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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는 샤워를 하며 자꾸 손을 멈췄다. 살에서 소리나게 여기저기 북북 밀며 딲는 것이 아니었다. 여자처럼, 여자답게 몸을 골고루 토닥이며 마치 어루만지듯 해야 했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 거울을 들여다보고 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미소를 지어봤다. 결국 그녀는 수건을 거울에다 던지고 나갔다.    ‘생긴 대로 살자! 새삼스럽게 미소씩이나!’외출이나 할까 하며 리빙룸의 벽시계를 쳐다보니 어느 새 일곱시였다. 지금 나가 봐야 샤핑 센타는 두시간이면 닫을 터이고 음식점들도 남은 음식을 팔아 치울 시간이다. 숙희는 컴퓨터를 켜서 인테넷으로 극장 프로를 점검했다. 마침 전쟁물 영화 하나가 눈에 띄였다. 표를 예매하는데 인스턴트 메세지가 떴다. 챌리였다.숙희는 챌리와 연이어 킴벌리와 여러 마디를 주고 받고 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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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는 정말로 아무런 생각없이 그와 헤어진 뒤 이십년을 바쁘게 살아왔다. 그러던 그녀는 설이라는 여자애를 만나고 나서 부터 시계가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숙희는 하루종일 누웠더니 등이 배겨서 모로 누었다. 잠이란 게 자면 잘수록 느는 건지.   그 때 전화벨이 울었다. 숙희는 눈을 감고 내버려두었다.   ‘접니다. 오운진입니다.’ 귓전에 그의 음성이 들렸다.숙희는 소스라쳐서 눈을 떴다. ‘응?’설이가 수화기를 내민 채 곁에 서 있었다.숙희는 머리를 잠시 흔들어 정신을 차린 후 설이를 올려다봤다. ‘뭐니? 안 나갔어?’   ‘삼춘인데요? 아줌말 찾아요.’숙희는 생전 보지 못한 수화기를 눈 앞에서 보고 설이를 다시 한번 올려다 봤다.   ‘삼춘 지금 요기 오션 씨티에 와 있대요. 그래서 제가 아줌마 방을 가..

pt.2 5-1x041 이제는 서로에서 풀려날 때

이제는 서로에서 풀려날 때   캘리포니아로 돌아간 숙희는 줄곧 메릴랜드의 남자 즉 방탕한 생활의 사내를 생각하며 지냈다.숙희는 한동안 우울증 비슷한 증세에 입맛도 없고 괜히 피로해서 며칠 병가를 냈다. 그리고 주말을 맞았는데, 설이가 일찍 퇴근해서는 숙희가 누워있는 방을 노크했다.   “들어와, 설이야.” 숙희는 침대에서 윗 몸만 일으켰다.  설이가 방문을 조금씩 열고 들어섰다. “아줌마, 이거요.”숙희는 설이가 손에서 내미는 누런 종이봉지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 “그게 뭐니?”설이가 숙희의 침대 발치께로 왔다. “아줌마 좋아하시는 식당 수프!”   “얘는, 그런 걸 뭐 하러 사 오니.”   “아줌마 입맛 없으시면 카페테리아에서 이 수프만 잡수셨잖아요.” 숙희는 아이의 정성이 고마와 스푼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