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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뵈었을 때부터 남자분이 좀 특이하시다 여겼는데..."   숙희가 운진을 찬찬히 살펴본다. "꽃가게라 해서 남자 하지 말라는 법은 없죠."운진은 그저 눈만 내리깔고 있다. 꽃가게로만 소문 난 모양이네...운서가 과일 깎아 담은 접시를 내왔다.그것을 운진이 얼른 받아서 내려놓았다.숙희는 그런 움직임을 물끄러미 볼 뿐이다.   "들어요."   운서가 숙희 옆 의자에 앉았다. "그 동안 불편해서 어떻게 사셨누?"   "침대나 가구를 집에서 가지고 나올 수도 있었는데, 늘 가질러 간다는 생각만 하고. 정작 실어올 방도가 없으니까 차일피일 지내다가 지금까지 왔어요."   "그나마도 내가 방문 안 했으면... 연말부터 굉장히 추워진다는데, 찬 바닥에서..."   "그러게요."   숙희가 운진에게 새삼 고맙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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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 건물에 한국 처녀가 하나 산단다.   침대를 하나 사려는데, 지금 사면 배달은 내년에나 된다는구나.    내년 해봐야 며칠 안 남았지만 추운데 바닥에서 어떻게 담요만 깔고 계속 자니.   네 추렄으로 가서 좀 실어오려무나.   전에 네 추렄으로 그 처녀네 아버지 짐을 실어다 준 적이 있다며?그래서 이튿날, 운진은 누이의 말을 듣고 아파트로 갔다.그리고 추렄의 히터를 들어놓고 하늘색 혼다 차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왔다!'운진은 용기를 내어 추렄에서 내렸다.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갔다. "이렇게 또 만나는 자체가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숙희가 눈을 크게 떴다. "우연이 아니라뇨?"   "우리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서 다시 만나지고 있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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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프라노 독창과 베이스의 리더가 빠진 그 날의 연습은 지휘자의 혈압만 올렸다고.병선이는 그 날따라 더 엉망이었다고.운진은 밥 같은 밥 좀 달래려고 모친에게 갔다가 그런 말을 전해 들었다.   "니 누나가 너 패주러 온댄다. 숨을래?" 그의 모친이 아들의 등을 툭 건드렸다.   "내가 갈게, 엄마."   "갈 때 뭣 좀 줄게 누나 갖다 줘."   "쟤들은, 엄마?"운진은 리빙룸 바닥에서 뭘 갖고 노는 두 조카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 남자가 애들을 싫어한다잖아."   "매형이 반항으로 어떤 여자를 맞았나 본데. 날 보는 눈빛이 좀 그렇던데."   "..."   정인은 아들의 신끼있는 말을 가끔 귀담아 듣는다. "반항이라고?"   "하긴 그런 거에 자극 받을 누나 아니지만."   "누나가 그 땐 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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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선이가 사촌형을 염려하면서 핑게 김에 진희에게 말을 붙이려는데.진희는 마치 모르는 사람을 경계하듯 그렇게 뚝 떨어져서 걷는다.운진은 어리어리한 머리를 손으로 툭툭 치며 계단을 오른다.이층 성가대 연습실에 사람들이 이미 와 있는 지 웅성웅성 소리가 들려왔다.누가 그들의 뒤에서 계단을 퉁퉁거리고 뛰어오른다.   "아, 오군!" 지휘자 선생의 음성이다.운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부터 숙였다.   "그래도 오늘은 나와주었군. 오늘 연습만 잘 해도 오군은 될 거야."   지휘자 선생이 진희를 봤다. "오! 미쓰 강도 오네!"진희는 고개만 숙여 인사했다.병선이만 인사 주고 받는 데서 빠진 것이다.   성가대원들이 하나같이 운진을 반가워했다.운진은 그저 고개만 주억거렸다.그의 누이 운서가 동생을 유심히 보다가 앞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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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타 오 안 오시면 나도 나갈 이유가 없는데요.진희가 전화 와서 한 그 말에 운진은 움직였다. 병선이 새끼하고 만난 게 무척 걸리는 모양이군.운진이 교회 앞에 도착하니 진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정문을 열고 나왔다.그리고 그녀가 그를 그의 추렄으로 밀고 갔다.   어저께 화원에 없었어요?   있었어요.   근데, 전화 왜 안 받았어요?   오, 지니씨, 전화, 어제도 했었어요? 왜 아까는.진희가 주위를 살펴봤다. 저 말구요. 영진이가 한국에서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했대요!   아이고! 녜!운진은 문자적으로 제 머리를 때렸다. 멀리서 벨 소리는 들었는데.   영진이 한국에 할머니네 집에 붙잡혀서, 어쩌면, 못 들어와요.   왜요! 학교는!   거기서 선 보고 시집가래나 봐요.   헷! 운진은 교회 건물을 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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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도 저녁에 교회에서 특별찬양 연습이 있다고, 성가 대장이 일일히 전화 연락을 하면서...   "미스타 오 추렄은 우리 집 앞 언덕길을 잘 올라온다며?"   최 장로가 운진에게 전화해서 하는 말이다. "우리 집 앞길이 빙판일쎄. 뉘집에서 물이 샜는지. 그 자네의 추렄으로 우리 집 딸 둘을 태우러 올 수 없겠나?"운진은 어이가 없지만 상대가 그래도 장로라서 대번에 거절하기가 좀 그렇다. "작은따님도 성가대 연습에 참여하나요?"   "걔가 피아노 반주를 해야 해."   "원래 해 오던 반주자가 할 텐데요."   "그만 둔대."   "또요?"   "또요라니?"   "저더러는 계속 한다던데요."   "그래? 언제?"   "그저께도요."   "난 못 들었는데. 그만 두겠다는 말 밖에는."   "여태 호흡을 맞..

13-1x121 1977년 그들의 겨울

1977년 그들의 겨울   운진은 어쨌거나 약속은 약속인지라 성가대의 연습에는 빠짐없이 참여했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힘이 없고 그저 악보 콩나물 대가리나 읊는 정도였다. 그가 그러하니 그의 곁에서 그의 음을 따라잡는 이들도 자연히 소리가 안 나왔다. 성가대 대장과 지휘자는 불만이었지만 참는 기색들이었다.지휘자 선생이 쏘프라노 독창이 불참인데다가 알아보니까 버지니아 주에 내려가서는 연락 불통이라고 아주 노골적으로 식식거렸다.정작 아버지인 최 장로도 연락이 안 되어 소식을 모르겠다고 사죄만 했다.그런데 유독 운진만 눈치챘을까.   장로가 되어 갖고 거짓말 하는데?운진은 저도 모를 어떤 지레짐작에 몸서리를 쳤다. 집에 있으면서 안 나오는 거 같은데?반주를 맡은 영아는 어려운 부분을 자꾸 틀리게 쳤다.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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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진은 화원으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찾은 것이 술이다.희한한 것 한가지는...그는 술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평상시에 멍청하다고 여기는 머리가 맑아지는 것이다.오늘 그는 그런 술이 하고 싶었다. 그는 취하고 싶었다.그런 다음 그는 생각을 하고 싶었다.그는 영진이란 여자가 오빠와 돌아간 이후와 한국으로 나갔다는 싯점을, 술 힘을 빌어, 수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차근차근 따져보려는 것이다.그는 학교에서 우편으로 온 파이널 결과를 받아서 알고 있다.   2.1 지피에이로 통과한 결과를.   미쓰 킴은 아마 원하는 삼 점 영을 넘었겠지. 그래서 맘 놓고 한국을 나갔나 보다.운진은 사촌동생이 봉지를 끌어안고 들어서는 것을 그냥 보기만 했다.   "성, 진희랑도 헤어졌지?"병선의 그 말에 운진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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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진은 추렄을 몰고 가는 길이 갑자기 생소하다.   어떻게 된 거야...   오빠와 다투고 따로 가 놓고는 갑자기 한국엘 나가?그는 눈 앞에 생생한 꿈의 장면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하긴 내가 그런 성탄절 노래를 언제부터 잘 알았다고.    게다가 영어로 척척 불러.    우리 가사로도 못 부를 노랜데.   게다가 내가 언제부터 기도를 했어.    주기도문도 아직 못 외운 주제에.그는 햇살이 너무도 강한 바람에 눈을 제대로 못 떴다.   운진은 한국에서부터 옛매형과 잘 지냈던 편이다. 반면, 정작 누이는 그와 잘 지내지 못 했다. 특히 미국 와서 두 사람의 거리는 급속도로 멀어지다가 누이가 잠시 일 했던 무슨 디자인 회사에서 지금의 남자를 만나...운진은 그 생각만 하면 고개를 젓는다.어려서부터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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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진은 깜짝 놀라며 일어나 앉았다. 그는 어두운 사방을 둘러봤다. 그리고 그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전화벨 소리가 났다.그는 침대에서 후닥닥 일어나 부엌으로 달려갔다.   여보세요!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영진씨?   운진씨 찬양하는 거 다 보고 들었어요.   그랬어요.   그리고 운진씨 기도하는 것도 다 들었어요.   그랬어요.   정말 저는 부활되나요?   하나님을 모르고 죽은 사람들은 부활로 한번 더 기회가 온대요.   그 때까지 절 기다린다구요?   녜.   그러지 말고 좋아하는 이를 만나서 재미있게 살면서 제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말해요. 무슨 말이든 다 들어줄께요.   그 좋아하는 이와 결혼해서 딸을 낳으면 걔가 저예요.   아... 하하하하! 아하하하하!운진은 자다가 깨어서는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