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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시간 후 조문객들의 발걸음이 뜸해 질 무렵 운진은 휴게실에서 숙희를 만나 그동안 받아 모은 봉투들을 건내려 했다.숙희는 봉투 따위는 모른 척 했다.    “좀 앉으세요. 바로 가 보셔야 해요?”그녀가 그의 손을 잡아 벤치에 앉혔다. 아주 자연스럽고 능숙했다.운진이 되려 손 잡힌 것에 쩔쩔맸다.   “아뇨. 가겐 보는 사람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한참 서 있었더니 다리가 아파요.” 숙희가 다리를 두드렸다.   “운동하신 분이 다리가 아파요?”숙희가 다리를 두드리던 동작을 멈추고 운진을 보다가 웃고는 다시 계속했다. “제가 지금 몇살인데 아직도 운동타령이예요?”운진은 할 말이 없어 탁자에 내려놓은 봉투들을 내려다봤다. ‘얼만지 세 준다 할까?’   “운진씨두 많이 늙으셨네. 세월이 많이 흘렀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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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모두에게 봄이 왔다.이제 운서고모는 주말에 안 온다. 주말에는 거의 빈 집이기 때문이다.운진은 새 여자를 사귄다든지 하는 것 없이 그저 가게일에만 충실했다.킴벌리는 집에서 가까운 칼리지로 입학허가 통지를 받았다. 실력이 챌리만은 못 했던 모양, 언니가 다닌 대학에서의 합격 통지를 못받았다.   세 부녀는 연휴 때마다 골고루 놀러다녔다.딸들이 나이 더 먹고 남자가 생기고 시집을 가면 평생 없을 기회를 미리 챙긴다고...지난 해 연말은 비행기를 타고 플로리다에 다녀왔다.얼마 전에는 차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다녀왔다. 세 부녀가 교대로 운전하며...갈 때마다 챌리가 준비한 여행 안내 가이드는 가 볼만한 곳의 지도, 극장, 샤핑몰, 레스토랑 등등 인터넷에서 뽑아낸 분량이 제법 많았다. 운진은 그저 엄지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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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리의 뺨은 전반적으로 발그스름해 보였다. 단지 입술이 조금 부르텄다. 그는 킴벌리의 눈치를 살피다가 의외로 작은놈이 화가 풀린 눈치라 저으기 안심하고 밥을 부지런히 펐다.   "아빠. 아빠 아직 화났어요?" 챌리가 눈은 여전히 내리깐 채 조심히 물었다.   "아니. 화 안 났어."   "아까 아빠가 나 때리니까..."   "응. 아팠지? 미안해."   "아빠가 나 때릴 때, 난 알았거든?"    그제서야 챌리가 눈을 들어 아빠를 봤다. "아빠가 나 사랑하는 거..."   "그럼, 임마! 너 그러는 거 아니었어."킴벌리가 헤헤헤 하고 웃었다.   "Daddy was crying, too! (아빠도 울고 있었어!)" 챌리가 킴벌리에게 말했다.세 부녀는 금새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늦은 저녁을 마쳤다.   앞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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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진은 챌리가 영아의 뒤를 따라 나오려는 것을 야단쳐서 도로 들어가게 했다.킴벌리가 아빠의 눈치를 보면서 제 언니를 집안으로 들어오게 했다.운진은 형록과 영아에게 치하를 한 후, 그들의 밴이 떠난 뒤에 안으로 들어섰다.챌리가 문간에 서서 바닥을 내려다 봤다.   “니 방으로 가! 어서!” 운진이 고함을 쳤다.킴벌리가 제 아빠를 흘겨보고는 챌리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Come on!”운진이 챌리의 손을 잡아 끌어세웠다. “얼굴 좀 보자. 괜찮냐? 미안햄마!”챌리가 고개를 숙였다.운진은 챌리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용서해라. 미안하다, 챌리야.”챌리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운진은 머뭇머뭇하다가 챌리를 안아주었다.    “짜식아! 아빠 가슴에 못을 박어?”챌리가 제 아빠에게 안긴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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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형록이 밖에 왔다. 그가 유리문을 밖에서 두드리며 안을 들여다 봤다.운진은 문을 열어 그를 들어오게 하고 문을 잠그라고 손짓했다.형록의 손에 비닐백이 들려있었다. “치킨 좀 사 왔우. 출출할 것 같아서.”   “좋지. 장사는?”   "비 오는데 바빴을 리 있우?"   "술은 뭘로 할래?"   “그 왜 우리 맨날 먹던 거, 그걸루 하지, 뭐.”운진은 4홉짜리 와이트 레벨을 집어들었다. 두 남자는 가게문이 제대로 잠겼나 다시 한번 확인하고 뒷방으로 들어갔다. 두 남자는 한참 동안 말없이 주거니 받거니 위스키를 비우며 닭고기를 뜯었다.술병이 반쯤 내려 간 뒤에야 술 비우기를 멈추고, 형록이 입을 열었다.    “내가 가게를 나오기 전에 폴 엄마가 전화를 했는데 말유, 키미하고 쵀리하고 대판 붙었답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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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아씬 들어가 계세요. 내가 가서 데려올께요.” 운진은 차의 시동을 걸었다.   “키미한테 얘기를 잘 해서 데려오세요. 만일 안 따라오려 하면 저한테 연락...”영아의 망설이는 모습에서 운진은 거리감을 느꼈다. 안 따라오려 하면 연락을? 영아는 사뭇 그 집 밴차로 갈 기세였다.   “그러면 차라리 처제가 챌리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가든지. 난 다른 데 가 있다가 아이들이 풀어지면 연락 받고 가던가. 여기 좁은 데에 애들을 데려다 놓느니, 차라리...”   “잠깐 계세요, 그럼?” 영아가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운진은 차의 발동을 끄고 내렸다. 그는 조금씩 굵어져 가는 빗발울을 올려다보며 가게를 기웃거리며 영아가 나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챌리가 애써 아빠의 차를 외면한 채 나오고, 영아가 아기를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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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 운진은 죄의식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하며 바닥에 앉은 딸에게 소리쳤다.   “다시 말해 봐! 다시 말해 봐!”영아가 넘어진 챌리를 부축하고, 형록이 운진을 붙잡았다.   “내가 니 아빠 아니라구? 다시 말해 봐, 이 새꺄! 내가, 그럼, 누구야!”챌리의 입술이 터져 피가 맺혔다.      “왜, 내가 안 낳았으니까 아빠가 아니다 이거야? 너 이 새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운진이 형록의 팔을 풀려고 몸부림을 쳤다. “놔 봐! 나 오늘 저 새끼 죽여버릴 거야! 배은망덕한 놈의 새끼! 유 낱 마이 파더? 아빠가 아니잖아? 그걸 말이라고 해? 나한테 그 따위로 말해?”영아가 챌리를 끌고 가겟방으로 들어갔다.   “이리 못 나와? 좋게 말할 때 나와라? 내 들어가면 너 진짜 죽는다!”   운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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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가 할머니를 삼촌 집에 내려줄 겸 또 인사차 가게에 들렀다. 그녀는 캘리포니아로 취직이 되어 가는데 우선 임시 거처는 숙희가 방 하나를 내준다고 했다. 운진은 뭐라 할 말이 없어 돈 오천불만 쥐어주었다.변호사비가 정말 오천불 밖에 안 되는지...설이가 가기 전에 자꾸 뭐라 하려는 것을 운진은 애써 무시했다. 짐작에 숙희의 얘기를 하려는 줄 알고 피했던 것이다.   애들 친할머니는 미웠던 며느리는 며느리고 또 죽었으니 이제 남은 손주들이 가여워 할머니들 특유의 비위맞춤으로 아이들을 달랬다. 특히 킴벌리는 할머니가 손도 잡으려 하고 머리도 쓰다듬으려는 것을 질색하다가 이내 받아들였다. 금새 킴벌리가 먹고 싶다는 음식 주문이 척척 받아졌고, 반면 챌리가 겉돌기 시작했다. 은연 중에 노친네가 결국은 남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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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진은 바닥에 난장판인 그릇들과 음식들을 말끔히 치웠다. 그리고 나니 열한시가 넘었다. 아이들이 쫄쫄이 굶었다는 미안한 마음에 운진은 늦게라도 문을 열은 가게가 있을까 생각하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큰애의 방부터 두드리니 챌리가 얼른 문을 열었다. 챌리의 얼굴은 의외로 평온했다.    “아빠가 미안하다. 추태를 부려서.”챌리가 말뜻을 얼른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키미는? 걔 화났니?”챌리가 대답 대신 옆방의 문을 두드렸다. “키미?”   “What!” 킴벌리의 거친 외침이 터져나왔다.챌리가 문을 또 두드렸다. “아빠야.”   “What do you want! (뭘 원하는데?)” 운진은 챌리보고 됐다는 시늉을 해보이고 작은애의 방문 앞에 가 섰다.    “헤이, 키미. 라면 먹을래? 아빠가 끓일께.”방..

pt.2 3-1x021 스무해 묵은 분노

스무해 묵은 분노   아이들이 식탁에서 도망쳤다.   “저주해! 이 쌍놈의 늙은이야! 이젠 사위를 저주까지 해? 당신이 사람이야? 어떻게 저주할래! 나도 온 동네 아랫도리 내놓고 다닐까? 그 마누라에 그 남편새끼?”   “뭐, 뭐, 이런 게 다 있나? 아주 미친 놈이네?”   “미친 놈? 내 한번 미쳐볼까? 나 미치는거 한번 보여줘?”운진이 두르고 있던 가운을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안에 내읫바람으로 식탁을 들어엎었다. 그릇들이 사방으로 날아가고 국물이 튀고 밥들이 카펫 위에 엎어졌다. 일부 그릇들은 부엌까지 날아가서 깨지기도 했다.   “밥상 다시 차려! 먹을 수 있게 똑바로 차려!”   운진이 가운을 집어들고 이층으로 향했다. "나 같으면 사위한테 황송해서라도 잘 차리겠다."장모란 이가 너무도 어이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