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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란은 바보스럽고 만만해 보였던 남편이 어느 새 거인으로 느껴졌다. 그의 말투는 예나 지금이나 조심스럽게 한다. 그런데 그의 말 속에는 힘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가게로 들어오는 손님들 중 영란을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어떤 남자는, “Oh, oh, another one? (오, 오, 또 하나야?)” 하고, 영란의 배를 가리켰다. 영란도 운진도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못 했다. 아니.영란은 제 입술을 가만히 물었고, 운진은 그냥 식 웃었다.   챌리와 킴벌리가 뒷방에서 나와 엄마에게 말없이 고개만 숙여 인사했다. 한두달 새에 킴벌리의 키가 크게 느껴져 영란은 작은딸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킴벌리가, “잌스큐즈 미!” 하고는 등을 돌렸다. 챌리가 크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돌아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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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란은 조가가 사랑이라든지 좋은 감정으로 함께 사귀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어찌됐거나 그 자는 슬슬 본색을 들어냈다. "어째서 나가 그 집에 들어가 살면 안 된다는겨?"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았잖아."   "그 집이 임자 집 될 거라매?"   "그래두 재판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는..."   "그럼, 시방 우리 이렇게 몰래 교미만 하자고?"   "뭐, 뭐?..." 영란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쌍말에 억장이 무너진다. 교미라니!그 자가 다른 이유로 또 시비를 걸어왔다. 뱃속의 아이를 지우라는 것이다.    “내가 씨팔, 골볐냐? 남의 씨앗을 키우게? 떼라, 잉? 못 떼겠음 딱 반 짜르고 갈라서뿌려!”   "뭘 자르고 갈라서?"   "우리 동거하잔녀? 사실혼이랑개? 법적으로다 권리가 있다 이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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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진은 허쉬 파크라는 곳이 옛날에 와 봤던 그런 곳이 아님을 알았다.이제는 대형 어뮤즈먼트 파크라는 칭호를 받을 만하게 그 규모가 제법 어마어마했다.티켓 구매부터 출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마실 것 등등 운진은 과감하게 돈을 내놓았다. 기왕 온 것 기분좋게. 부담주지 말고... "얘들아."   "응?"   "아빠?"딸 둘이 기분 좋아 눈웃음까치 쳤다.   "만일 아빠가 저런 거 타다가 허트어탴(heartattack) 걸리면 구해줄 거지?"딸 둘이 서로 마주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가 하이 블러드 프레셔가 있잖아."   "오케이!"   "알았어!"딸 둘이 아빠의 팔을 양 옆에서 꾹 잡았다.   "아빤 사실 이렇게 딸들하고 데이트나 했으면 좋은데, 니들이 심심할까 봐."   "슈어!"   "데이트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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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진은 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노는 날인 일요일에 그 허쉬 파크를 가야 했다.뜨거운 여름 보다는 요즘처럼 선선한 가을에 가는 것이 베스트라는 것이다.   "아빠는 혈압, 하이 블러드 프레셔 때문에 그런 거 못 타."아빠의 궁색한 변명을 딸들이 뭘로 알아 들었는지 서로 보고 쿡쿡 웃는 것이다.챌리와 키미가 아주 간편한 옷차림으로 나섰다.그리고 두 딸이 비록 스무발 가면 그만인 주차장까지 아빠를 양 옆에서 잡고 갔다.   "Have you girls been at Hershey Park before? (너희 여자들 허쉬 파크에 가 본 적 있어?)"아빠가 물으니 챌리는 잠자코 있고, 킴벌리가 고개를 끄떡였다.   "챌리는? 안 가 봤어?"   "어..."챌리가 대답을 않는데, 킴벌리가 대신 말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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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들을 잔 바람에 결국 학교를 빠지고 가게에 따라 나온 킴벌리는 뭐가 좋은 지 연신 아빠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창고에서 물건을 꺼내올 때도 거들고 배달되어 온 물건들을 제법 의젓하게 점검도 했다.     작은딸은 점심으로는 튀긴 닭날개를 매운 쏘스에 발라 먹으며 아빠에게 계속 조잘댔다. 미워하는 선생의 얘기, 친구의 가정 얘기, 보고 싶은 영화 얘기 등등 쉬지않고 말을 이었다.   ‘얘는 결국 말 상대가 없었던 거야. 이렇게 말을 잘 하는 애를...’그러고 보니 작은애는 누굴 닯았는지 목소리가 약간 허스키하다. '허! 섹시하게!'어느 새 작은딸도 어엿한 숙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매력있는 모습으로.캐리아웃 아주머니와 복권 아주머니가 킴벌리만 보며 아유 아유 하고 감탄했다.아버지를 쏙 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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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숙희는 가면서 탈 것들이 나타나는 대로 설이와 올라갔다.네 살짜리 설이는 아예 겁대가리가 없는 아이처럼 놀았고, 한 살반짜리 민이는 삼촌이 잡아주는 대로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매달렸다.고-카트에서 비로소 운진은 설이를 태웠고, 숙희가 민이를 태우고 씽씽 달렸다.   공기총으로 쏴서 표적을 쓰러뜨리면 그 실적대로 상품을 주는 코너에서 운진은 숙희의 또 다른 면을 봐야했다. 그녀는 처음 한번만 쏘아보고는 장난감 같은 공기총을 이리저리 만졌다. 그리고 그녀는 쏘는 대로 명중 명중이었다.관리자는 상대가 여자이니 총 만진 것에 대해 말을 못 하는 모양이었다. 다들 못 맞추도록 조작해 놓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여자가 교정시키고는 잘 쏘는 것이었다.게다가 운진도 숙희 못지 않았다.결국 관리자가 그만 하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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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보기에 아이 하나 탄 케이블카가 몇칸 지나 대롱대롱 흔들리며 다음 교환 장소로 가고 있었다. 운진은 그 다음 도착한 빈 칸에 서둘러 올라앉았다. 허둥지둥 벨트를 묶으니 탄 것이 한번 빙그르 돌려다가 하늘로 떴다. 발이 허공에 떴다. 사람들의 머리가 내려다보이고 인공호수를 향해 간다는 것을 알고 운진은 앞을 열심히 살폈다. 아이가 미끄러지거나 무서워서 내리려 하면 일나는 것이다.어디선가 아이의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설이! 몸을 움직여 이리저리 보니 몇칸 앞에서 가고 있는 설이가 조그만 머리를 뱅글뱅글 돌리며 또 발을 까불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저게 저러다 떨어지면!’ 그러다 더 멀리를 보니 케이블카 줄이 왼쪽으로 트는데 민이의 손을 잡고 흔들어주는 숙희가 보였다. 한살반짜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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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의 일제 혼다 차로 가자는 걸 운진이 부득부득 우겨서 그의 추럭에 조카 둘을 태우고 펜실배니아 주에 위치한 허쉬 파크로 가다가 도중에서 차가 섰다. 차 앞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오고 역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운진은 차 후드(hood)를 열어 김이 다 빠져나가게 하고 트럭 뒤 짐 싣는 칸에서 빈 우유통들을 꺼냈다. 사방을 둘러보니 차들이 씽씽 달리고 그 고속도로를 건너야 주유소가 하나 보인다. 운진은 하나둘 하나둘 하고 기회를 보다가 찻길을 뛰어건넜다. 숙희는 그의 무모함에 속으로 놀랬다.주유소에서는 두말않고 물을 주었다고. 80년대의 흔한 풍경이었다. 비싼 부동액은 겨울이 다가와야만 물과 섞어 사용하고 평상시는 물만 채우고 다니던 그런 시절이었다. 차에 물을 붓고 잠시 기다렸다가 시동을 거니 몇번 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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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는 설이를 굳이 피할 이유가 없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설이는 다행히 요즘 아이 치고도 탁 트인 애같다. 어른에게라고 듣기 좋은 말만 하려는 것도 아니고 제 생각이나 느낌을 서슴없이 말하는 데에서 숙희는 자신이 이십대였을 때 미처 못 깨달았던 것들을 배운다. 그래서 숙희는 점심 시간에 일부러 사람들 눈에 잘 뜨일 자리에 앉아 설이를 기다렸다. 설이가 멀리 지나가다가 숙희가 손짓을 하자 방향을 바꿔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앉어. 오늘은 푸짐하네?”설이는 아마도 치즈버거 같은 샌드위치에 소다를 가졌다. “네. 아유! 다이어트 포기했어요.”   “잘 했다. 먹거 싶은 거 실컷 먹고 그 대신 운동을 해서 빼야지. 생으로 굶으면 병 생겨.”   “네. 호호.”   “너, 뭐, 그리 뚱뚱한 것도 아닌데 ..

pt.1 15-1x141 과거로의 재접근

과거로의 재접근    운진은 새삼스레 큰애를 돌아다 봤다.    “What blankets! (무슨 담요!)”챌리가 고개를 흔들며 나갔다.   “Dad. What time do you open your store? (아빠. 몇시에 가게 열어?)”   “Ten. Why? (열시. 왜?)”   “Can we go to 7-eleven to get something to eat? (세븐-일레븐에 뭐 좀 사 먹으러 갈 수 있어?)”   “챌리 오면.”한창 성숙기의 아이라 킴벌리는 먹고 먹어도 계속 배가 고픈가 보다고, 운진은 생각하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다! 그거다! 어떤 스트레스나 충격을 받으면 계속 먹는 것으로 치중하는 증세를 뭐라고 하더라...그런데 찬찬히 살펴 본 킴벌리는 그렇다고 비만하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