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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는 이제 늦게나마 자신을 위로해야 한다. 운진 그를 기다리며 오십이 되도록 결혼 안 했다는 것은 그녀의 거짓핑게이다. 차라리 동생이 앞질러서 시집 간 바람에 결국 언니의 혼삿길을 평생 막았다고 하는 게 더 양심적이다.    ‘공희는 좋겠다. 좋은 사람 만나서, 잘은 못 살아도 그렇게 정성으로 아껴주는데, 행복하겠지...’공희의 남편은 공희를 처음 본 순간부터 자신은 저 여자를 사랑한다고 했단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정을 억제 못 하고 공희에게 접근하고 청혼을 했단다. 다리를 다쳐서 저는 것은 눈에 안 들어왔다고.   게다가 돈 있는 집안인가 알아보지도 않았다고.   ‘그럴 수가...’아이들도 엄마의 절룩거리는 다리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단다. 사고로 그렇게 됐고 엄마가 자식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걸 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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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진은 숙희가 최 장로댁에서의 일에 대해 풀어져서 다행이다 싶어 안심하고 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녀에게서는 전화가 안 왔다...교회에서는 성탄절 찬양 준비로 바삐 돌아갔다.운진은 아무리 누가 불러도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숙희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안 왔다.    그는 감히 전화로 안부 정도 물을 엄두도 못 냈다. 숙희 그녀네 집에서 운진을 만나는 것을 반대하는데 불쑥 찾아가기도 뭐 하고, 또 그랬다가 더 악화될까 봐 참았다.그러다가 그는 그녀가 성탄절이라 교회를 나오면 잠깐 만나거나, 아니면, 집 동네에서 볼 수 있으려나 하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골목을 배회하는 것이 고작이었다.그는 요 핑게 조 핑게로 성가대를 피하다가 마지막 연습 때 최 장로에게 붙잡혔다.   숙희는 그녀대로 피치 못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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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진은 조금 부끄러워진 김에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으로 나갔다. 그가 얼음에 든 캔을 뒤지는데, “아니, 누군 성가대에 안 있나? 아니, 그리고, 누군 왕년에 명동 뒷길에서 술 한잔 꺾고 목청 안 올려봤나? 뽜브 티내고 있네, 정말!” 하는 성렬의 빈정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아, 십할놈,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뭐 저런 게 있어!’운진은 손에 쥔 맥주캔을 단숨에 비우고 빈 캔을 우그러뜨려 멀리 풀 숲으로 던졌다. ‘저 새끼가 내가 숙희씨랑 데이트 하는 게 배가 아파서 계속 씹네! 안 되겠네, 저대로 놔 두면!’운진이 마악 집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저기요!” 하고, 앞을 가로막는 여자의 음성이 있었다. 이 집의 그 딸이었다. “저 사람이 청년회 회장인가 본데, 미스터 오를 왜 저렇게 험담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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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안으로 들어가서 보니 집주인이 심부름을 시키는게 아니라 따로 차린 식탁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미스터 오는 이것저것 준비해 주느라 밥도 못 먹었지? 자, 이리 와서 들라구, 응?” 그래서 집주인 장로 양반의 손짓을 따라가 보니 넓직한 식탁 위에 음식이 잔뜩 차려져 있었다. 운진이 미적거리고 섰는데, 아까 그 여자가 밥공기가 담긴 쟁반을 부엌에서 가져왔다. 밥공기가 식탁에 옮겨 놓이는데 세개였다.   “빨리 와, 이 사람아! 젊은 사람이 왜 이리 숙기가 없어!” 집주인이 재촉했다.운진은 마치 죽으러 끌려가는 소처럼 움직여서 식탁으로 갔다. 집주인이 오라고 손짓하는 자리에 앉으니 아까부터 자꾸 보이던 그 여자가 집주인 옆에 앉으며 운진을 정면으로 봤다. 운진도 술기운을 빌어 그 여자를 똑바로 쳐다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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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커피를 마시고 도넛을 먹고 신나게 떠들며 세시간만에 바닷가에 닿으니 먼동이 마악 트려고 하던 참이었다. 둘은 차의 시동을 걸어놓은 채 차 안에서 겨울 해돋이를 감상했다. 차의 래디오를 은은히 틀어놓은 채. 해가 뜨면서 사방을 비추는데 그제서야 여기저기 흩어져서 바다를 향한 차들이 보였다.    그 때가 사귀기 시작한 지 일년째였나, 숙희는 무드에 젖어 그의 키쓰를 은근히 걱정했는데 그는 전혀 무드도 없이 앞만 내다봤다. 그래서 숙희는 그가 정말 순진한 걸 알았다. 그와 헤어진 후 숙희는 오운진이란 사내가 아닌 말로 여자 경험도 없고 소위 쑥맥이라 불리우는 그런 남자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죄의식이 커져갔다...   운진과 숙희 둘이서 겨울 바다 구경을 갔다온 후 어느 일요일날, 최 장로가 청년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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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겨울, 바다에서 해뜨는 것을 보러 가기 위해 숙희는 새벽에 집 앞에서 떨며 운진을 기다렸다. 암만 기다려도 그가 오지를 않아 무슨 일이 났나, 깜빡 잊고 자나, 약속 장소가 집 앞이 아닌가,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있는데, 시커먼 덩어리 하나가 소리도 없이 골목을 들어오는 바람에 숙희는 억! 하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며칠 전에 그와 같이 본 영화의 외계인의 침입처럼 비행 물체가 소리도 없이 골목에 내렸나. 어떻게 해! 그녀는 도망을 하면서도 그 시커먼 물체를 보니 자동차다. 캄캄한 골목이라 얼른 식별이 안 됐지만 자세히 보니 추럭이다. 더 자세히 보니 운진의 고물 추렄이다. 차가 불도 안 켜고 차의 시동도 안 걸고 소리도 없이 숙희 앞에 와서 멎었다. 숙희는 운전석쪽으로 달려가서 마침 차창..

pt.1 6-1x051 겨울 회상

겨울 회상   이튿날.가게를 찾는 손님이 뜸할 시간, 운진은 가게 뒷방에서 신문을 읽다가 누이의 전화를 받았다.   “내가 글쎄 누굴 만난 줄 아니?”    운서는 평소 그녀 답지않게 호들갑을 떨었다. “숙희를 만났다?”운진은 눈을 감았다. ‘왜 또 이러시나아! 십할, 잊을 만하면 이상하게 자꾸 연결되네?’설이가 전화로 알려줘서 오션 씨티를 달려갔다 온 자가 시치미를 뗀다.   “전에부터 멋쟁이였지만 지금도 보통 멋쟁이가 아니더라구. 니가 걔를 봤어야 되는 건데.”   “내가 봐서 뭘 어떻게 하라구요.”   “뭘 어떻게 하라는 게 아니라. 어떻게도 못 하지, 뭐, 지금 와서.”   “근데, 왜 갑자기 전화해서 이상한 말을 하시는데요, 누님?”   “아니, 그게 왜 화낼 일이니? 이상하다, 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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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거기 그만 뒀잖어!”   운서가 생각난 듯 말했다. "숙희 아줌마를 그만 두고 나중에 만난 거야?"   “오, 그건...”    숙희는 마시던 것에서 입을 떼고 말했다. “내가 다시 복귀시켰어요.”   "아줌마. 복귀가 뭐예요?"설이의 그 말에 숙희는 미소를 띄웠다. "리인스테잍먼트."   "아아... 리인스테잍먼트. 복, 귀."   "모닝 쉬프트(morning shift)로 바꿔 주면 잘 다녀."   "네!"민이가 이 사람 저 사람 말하는 것을 쫓아다니다가 숙희에게 몸을 기울였다. "What model, 아줌마?"   "S 500?"   "우와아아!" 녀석이 부러워 죽겠디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 때 노친네가 그 새 어디를 갔다오는지 자리로 가까이 오며 언성을 높였다. “야! 가자,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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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가 그 노친네의 거만한 반응에 울화가 치밀어 갈까말까 망설이는데, 설이가 재치있게 나왔다.   “아줌마! 저기 자리 비었어요. 여긴 저희가 뭘 먹어서 지저분해요.”    설이가 옆에 한칸 떨어진 빈 자리를 가리켰다. "마이끼! 클린 엎!"민이가 얼른 일어섰다. "슈어!" 설이는 덩치는 작지만 엄마를 마침 안 닮아서 눈치가 꽤 빠른 편인 모양이다. 설이의 모친 운서는 남의 비위를 잘 못 맞추는 편으로 기억되었다. 숙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설이의 정성에 미안해져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남매가 얼른 같이 와 앉았다.    “어주마, 뭐 마셔요? 드링크?”민이의 그 말에 숙희는 그 소년을 비로소 자세히 봤다. 민이는 엄마를 닮아서 제법 귀티나게 생겼는데 차림새가 허술해서 단정해 보이지는 않았다.    ‘전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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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는 운서언니에 대해서 궁금해 미치겠는 걸 참으며 백에서 셀폰을 꺼냈다.설이가 제 노키아 셀폰을 내리며 그 아줌마의 모토롤라 셀폰을 들여다 봤다. "와아!..."    “너 내일은 갈 수 있지?”   “거기요?”   “너 추레이닝 언제 끝났어야 하는데?”   “이번 주면 다 끝나는 데요, 돼요?”   "잠깐만!" 숙희는 손가락을 들어 잠깐 기다리라고 신호한 후 손에 쥔 셀폰으로 매리앤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써니를 아주 우연히 만났는데 집의 급한 가정사정으로 연락도 못 하고 결근을 했다고 하면서.    “Get her reprimand (시말서)...” 와 오전 근무자를 구하는 부서가 있나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설이가 아줌마에게 더 바짝 달라붙었다.   “Okay. Thank you!”숙희가 여간해서..